[21세기 현대사] ⑪ 구의역 사고로 드러난 열악한 청년노동환경

기관사가 꿈이던 97년생 김 씨가 있었다. 평소 깔끔한 성격이었고, 듬직하며 기특한 아들이었다. 월급날은 동생의 용돈을 챙겨주기도 했고, 아무 말 없이 가족을 챙기는 성격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에게 뽀뽀를 할 만큼 가족을 사랑했던 그였다. 그의 친구는 그를 ‘3년 동안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어려운 친구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2016년 5월 29일은 그가 만 20살이 되는 생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일을 맞지 못했다. 생일 하루 전인 2016년 5월 28일 그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9-4 승강장에서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16528일 오후 557

2016년 5월 28일 오후 4시 58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가 고장 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는 업체는 서울시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가 아니었다. 서울메트로의 협력업체였던 ‘은성PSD’라는 회사였다. 서울메트로가 스크린도어 유지관리 업무를 협력업체인 ‘은성PSD’에 맡겼기 때문이었다. 당시 19세의 김씨는 ‘은성PSD’에 입사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초보 직원이었다.

오후 5시 52분에 김 씨는 구의역에 도착했다. 그는 혼자서 역에 도착했고 역무원에게서 스크린도어 마스터키를 받았다. 그는 고장 난 스크린 도어가 있는 승강장으로 이동해서 직장 동료와 잠깐 통화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곧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마스터키로 스크린도어를 열고 선로 쪽에 들어갔다.

그가 작업을 시작한지 불과 15초 쯤 후에 지하철이 역으로 진입했다. 김씨는 진입하는 지하철을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몸이 지하철과 스크린 도어 사이에 끼이는 순간, 작게 ‘쿵’하는 소리가 났다. 김 씨는 사고 직후 살아 있었지만, 병원으로 옮겨지는 중 사망했다. 김 씨의 시신은 처참했다. 김 씨의 어머니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얼굴이 퉁퉁 부어있고 뒷머리가 날아가고 없는 시체가 누워있는데 20년을 키워온 어미가 그 아들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은 저희 아들이 아닙니다. 뒤통수만 봐도 우리 아들을 바라볼 수 있는데 아들의 뒤통수가 날아가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절대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절대 우리 아이가 아니라 믿고 싶었는데 짙은 눈썹과 벗어놓은 옷가지를 보니 저희 아이가 입고 나간 옷이 맞습니다.”

이 사고로 서울메트로는 20분 동안 지하철 운행을 중지했다. 하지만 이내 사고 수습이 된 후인 오후 6시 23분부터 열차 운행을 재개했다.

19세 김 씨가 사망한 이유

사고 후 서울메트로 측은 김 씨의 유가족을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2인 1조가 아니면 절대로 수리 허가를 안 한다, 그 이외에 문제는 나는 모른다”

이에 대해 유가족은 강하게 항의했다. 사망한 김 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메트로 관계자가 죽은 우리 아들 책임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빈소를 차리고 장례를 지낼 수 있겠느냐”며 “서울메트로는 사과한다고 말하지만 ‘아들에게 일부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스크린도어를 정비하고 수리할 때의 규정은 2인 1조로 작업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사고 당일 김 씨는 혼자 수리작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2인 1조로 작업하도록 매뉴얼을 정해놓은 이유는, 바로 작업자의 안전 때문이었다. 위험한 작업을 하다 보니 만약의 경우에 수리하는 사람외의 다른 한명이 작업자를 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김 씨는 그날 혼자 일을 하고 있었을까? 단순히 김 씨 개인이 규정을 지키지 않아 일어난 개인에게 책임이 있는 사고였을까?

김 씨의 유품

사실 김 씨에게는 2인 1조로 일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사고 발생 당시 김 씨가 포함된 근무조는 총 6명의 인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6명의 인원은 49개 역의 안전문 처리를 맡고 있었다. 6명 중의 2명은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나머지 직원 4명이 짝을 이루어 지하철역 현장으로 출동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에 평균적으로 발생하는 스크린도어 장애는 30건이었고, 많은 날은 40~50건에 이르기도 했다. 은성PSD 관계자는 “이용객들이 많은 시간 주로 장애가 발생하다 보니 인력이 부족할 때가 종종 생긴다. 사고가 났을 때도 그랬다”고 말했다.

게다가 서울메트로와 은성PSD가 맺은 계약서엔 ‘장애 발생 1시간 안에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지시사항이 있었다. 이를 어기게 되면 ‘주의’ 조치를 받을 수 있었고, 주의가 누적되면 재계약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은성 PSD 직원들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조항이었다. 김 씨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출동이 떨어지면 가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서울메트로 쪽에서 짜증을 낸대요, 전화해서.”

그런데 김 씨가 사고가 당한 그날, 구의역에서 사고가 신고 된 4시 58분과 김 씨가 구의역에 도착한 5시 52분 사이에 한 건의 신고가 더 접수되었다. 을지로4가역에서 5시 20분에 고장 신고 한 건이 더 접수된 것이다. ‘2인 1조’ 원칙을 지키기 위해선 가장 가까운 경복궁역에 있던 다른 직원이 구의역에 와서 김 씨와 함께 정비를 마치고 을지로4가역으로 가야 하는데, 최소 이동 시간만 5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결국 ‘2인 1조’ 원칙을 지키면 구의역과 을지로4가역 모두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없었고, 김 씨는 혼자 작업을 하게 되었다. 6명의 직원이 49개 역사를 맡아 관리하면서 1시간 안에 도착해 2인 1조 정비를 하는 건, 사실상 지킬 수 없는 규정이었던 셈이었다.

이렇게 시간에 쫓기며 근무를 하다 보니 김 씨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겨를도 없었다. 사고 이후 유가족에게 전달된 김 씨의 유품인 가방 속에는 비닐 포장이 벗겨진 컵라면 하나가 들어있었다. 김 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밥 시켜놓고, 출동 떨어져 못 먹는 경우도 많았다고 얘기했었다. 사고 당일에도 종일 굶을까봐 컵라면을 싸가지고 다녔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죽음의 책임 떠넘기기

스크린도어 사고는 김 씨의 사망사고 이전에도 3건이나 더 있었다. 2013년부터 매년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2015년 8월 말에도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유진메트로컴 직원 조모씨(29·사고당시)가 사망했고, 2013년 1월 은성PSD 기술팀장 심모씨(37·사고당시)도 2호선 성수역에서 작업 도중 사망했다. 모두 홀로 작업하다 사고를 당했다.

같은 유형의 죽음이 이어졌지만 사망자들이 소속된 업체나 서울메트로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2013년에 사망한 심 씨의 사고 후 은성PSD는 업무상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혐의없음’ 처벌을 받았고, 과태료 30만원만 물었다. 2014년 4월 독산역에서 사망한 노모씨도 보상은 받지 못했고, 업체는 벌금 100만원의 처벌에 그쳤다. 2015년에 사망한 조 씨 사고도 김 씨의 사망 사건이 있을 때까지 경찰 조사조차 마무리되지 않았다.

김 씨 사망의 경우에도 서울메트로는 ‘개인과실’에 무게를 두는 주장을 했다. 서울메트로는 사고 당일 브리핑에서 “김씨가 구의역에 구두보고를 했지만 2인1조 규정을 지키지 않고, 다른 직원이 오기 전 무리하게 작업을 하다 화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2인 1조 규정은 현실적으로 지키기 불가능한 규정이었다.

심지어 서울메트로는 사망 사고 당일 김 씨가 작업 중 통화를 하며 부주의했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언급까지 했다. 하지만 CCTV확인 결과 작업 중 통화를 한 것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오히려 문제가 심각했던 것은 서울메트로 측이었다. 김씨는 스크린도어 수리 전에 분명 서울 메트로 역무원에게 수리를 통보했다. 하지만 서울메트로 정직원인 역무원 3명은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스크린도어에서 작업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을 서행으로 진입하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황실의 CCTV를 보며 지하철이 들어오는 지,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은 CCTV를 지켜보고 있지도 않았다.

김 씨의 어머니는 “(서울메트로 직원이) 경찰서에서 CCTV를 확인하고서야 미안하다고 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메트로는 사고 3일 뒤인 31일이 되어서야 ‘이번 사고는 김씨의 책임이 아닌 서울메트로의 책임’이라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애도의 물결

사고 소식이 알려지고 그날 저녁 8시 부터 구의역 9-4 승강장에는 하나 둘 씩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시민들에게 검은 리본을 나누어주기 시작했고, 검은 리본을 단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9-4 승강장에는 그의 가방에 담겨 있던 컵라면과 즉석 밥과 먹을 것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메모지에 추모의 메시지를 담아 스크린도어를 덮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인건비 아끼려다 사람을 죽였다’, ‘네 잘못 아니야’,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어’, ‘그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 ‘안전에서도 비정규직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냐’, ‘정규직 꿈꾸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등의 메시지를 남기며 고인을 추모했다.

추모에 참가한 김수영(당시 25세)씨는 “(김 씨의 일은) 비정규직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돼 참담해요.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늘 구의역이 나왔습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가자 강현용(당시 64세, 서울 관악구)씨는 “우리 아들도 고등학교 마치고 대학 대신 피자배달을 택했어요”라며,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하는데, 저녁 먹을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우리 아들도 피자배달을 했는데 많이 위험하잖아요. 김 씨의 죽음이 남 일 같지 않았어요.”라고 했다.

세월호 유가족도 김 씨의 빈소를 찾아 그를 추모했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과 김광배씨가 김씨의 부모를 위로했다. 김씨의 어머니가 말했다. “(죽은) 아이에게 직장에서 상사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그랬어요. 저 때문에 죽은 거예요.” 유경근 위원장은 대답했다. “저도 (세월호 참사 당시) 예은이에게 선원 말 잘 들어라, 방송 지시 잘 따르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떠났어요.”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은 그렇게 서로를 위로했다.

김씨 아버지는 “우리 아이도 세월호 참사 때와 비슷한 시기에 수학여행을 갔다”라며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죄송하다”라고 말했다. 이에 유 위원장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빨리 진상 규명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부족했다”라며 똑같이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한편 김씨의 어머니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아이를 기르면서 책임감이 강하고 떳떳하고 반듯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절대 우리 아이를 잘못 키운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둘째 아이에게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며 키우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책임감이 강하고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에게 개죽음만 남을 뿐입니다. 개죽음, 산산조각이 난 아이를 개죽음으로 내몰고 첫째를 그렇게 키운 것이 미칠 듯이 후회됩니다.” “저는 이제 평생 아이를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식구들 모두를 죽여 놓고 원통함을 풀 수 없게 우리아이의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들, 이 진실을 제발 알아주시고 저희 아이의 원통함을 제발 풀어주세요.”라고 호소했다.

김 씨 어머니의 기자회견 전문

바쁘신 와중에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기자님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제가 엄마이기 때문에 지금 울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 용기를 내야 합니다.

한 가지 부탁드립니다. 동생이 있기 때문에 제 사진이나 목소리의 변조를 부탁드립니다. (둘째)아이가 상처를 받고 다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지금 저희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필요 없습니다. 제발 우리 아들이 살아서 제 곁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볼 수 없는 우리 아들 좀 살려 주십시오. 저는 지금도 우리 아들이 온 몸이 부서져서 차가운 안치실에 누워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회사 측에서는 지킬 수 없는 규정을 만들어놓고 아이가 규정을 지키지 않은 사고로, 아이의 과실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너무 억울합니다. 메트로 설비처장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보고를 안 한 아이의 과실이라 했습니다. 전자운영실에 보고를 안 하고 작업하면 전철이 평소 속도로 들어와 죽는다는 것을 정비노동자가 잘 안다고 했습니다.

어느 누가 그 위험한 작업을 혼자 하겠습니까. 아이가 잘못한 것은 밥 먹을 시간 없이 배운 대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우리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해서 개죽음을 당한 것입니까. 기자님들께 간절한 부탁을 드리고 싶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정말 힘이 없는 저희들로서는 여론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이의 잘못이 아님을 반드시 밝혀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 아이의 원통함을 밝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굴이 퉁퉁 부어있고 뒷머리가 날아가고 없는 시체가 누워있는데 20년을 키워온 어미가 그 아들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은 저희 아들이 아닙니다. 뒤통수만 봐도 우리 아들을 바라볼 수 있는데 아들의 뒤통수가 날아가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절대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절대 우리 아이가 아니라 믿고 싶었는데 짙은 눈썹과 벗어놓은 옷가지를 보니 저희 아이가 입고 나간 옷이 맞습니다.

어느 부모가 그런 처참한 모습을 보고 이 땅에서 살아가겠습니까. 저희 아이가 죽으며 저도 죽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예전 사랑스럽던 아이 얼굴이 기억이 안 납니다. 처참하게 찢어진 얼굴만 기억나고, 전동차에 치이는 모습만 기억나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지하철 저 소리같이 혼자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요. 3초만 늦게 문을 열었으면 지금쯤 우리 아이가…

제 남은 인생은 숨을 쉬고 있지만 제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아닙니다. 살아가겠지만 그래도 제가 부모로서 우리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아이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 밖에 없습니다. 기자님들 제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이가 살아 돌아올 수 없다면 우리 아이의 잘못이 아니란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저도 우리 아이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억울하게 보낼 순 없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지금 뭐하는 건지 아직 빈소도 마련하지 못하고 차가운 안치실에 우리 아이가 있습니다. 제발 우리 아이를 떳떳이 보내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는 힘도 빽도 없는 사람이라 우리 아이를 위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게 이렇게 기자님들한테 부탁 드리는 게 전부입니다. 이렇게 밖에 못 하는 게 우리 아이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어미가 할 수 있는 게 우리 아이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를 기르면서 책임감이 강하고 떳떳하고 반듯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절대 우리 아이를 잘못 키운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둘째 아이에게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며 키우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책임감이 강하고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에게 개죽음만 남을 뿐입니다. 개죽음, 산산조각이 난 아이를 개죽음으로 내몰고 첫째를 그렇게 키운 것이 미칠 듯이 후회됩니다.

우리 아이가 어떤 아이였냐면 겉모습은 무뚝뚝하지만 착합니다. 20살이 되어도 부모한테 뽀뽀하는 아이인데 자기가 대학을 포기하고 저희는 부모로서 누가 공고(학생)가 되어 돈을 벌어오라 했겠습니까. 자기가 장남으로서 공고를 들어가 우선 취업을 해 부모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대학은 나중에 가겠다고. 그 때 말렸으면 정말…자기가 그렇게 취업을 하고 적은 월급을 쪼개서 백 몇 만원 되는 월급을 적금을 부어서 5개월 하면서 둘째에게 용돈까지 주는 아이였습니다. 끼니를 거르며 혼자 견디고 집에 와 쓰러져 잠들어도 부모에게 내색 안하고 직장을 다녔습니다. 안전장치 전혀 없는 환경에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줬다면 저희는 당장 그만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백 몇 만원이 뭐라고, 당장 그만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장남이고 책임감이 강하니까 부모에게 말하면 그만두라 할 거고, 자기는 조금만 더 참으면 공기업 직원이 될 것이란 희망을 갖고 참아온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 아이를 책임감 없는 아이로 키웠다면 차라리 그런 아이였다면 제 곁에 있을 것 아닙니까?

쓸데없이 책임감이 강해서 지시를 고분고분 따라서 엄마도 회사 다니지만 상사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왜 제가 그렇게 얘기했을까. 지금 모든게 후회스럽고, 잘해주지 못한 게 너무 한이 됩니다.

장례를 치르는 저도 친구들이 병원에 와 알게 된 내용입니다. 졸업 후에 친구들과 함께 여행가는 것을 계획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주말에 일을 하니까 시간을 맞출 수가 없으니 자기는 다음에 가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들만 가고 이 아이는 못 갔다고. 저는 그 내용을 몰랐습니다. 친구들한테 그 내용을 듣고 보니까 부모 때문에 돈 들까봐 여행을 못 간 건가. 그런 내용을 알면 제가 속상할까봐 아이가 말 안 한거죠. 아이가 살아있다면 속이 깊다고 말하겠지만 지금은 가슴이 미어집니다.

우리 아들 생일이에요. 연락을 받고 다른 날도 아니고 자기가 태어난 날 그날 일 잘 갔다오라고 엄마가 케이크라도 사와서 식구들끼리 자르며 축하해 주겠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건 말이 안 돼요. 죽은 당일 날도 보니까 하루 종일 굶어가면서 시키는 대로 시간에 쪼개서 일했을 텐데. 우리 아이가 잘못해서 저렇게 처참하게 자기가 잘못해서 죽은 거라는 (주장은)너무나 불쌍하고 너무나도 원통합니다.

유품이라고 그 은성(용역업체)에서 줬다는 갈색 가방 병원에서 받았습니다. 아이 가방을 처음 열어봤어요. 처음 열어봤는데 거기에 사발면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공구들하고 숟가락이 뒤섞여 있어요. 비닐에 쌓인 것도 아니고. 그 사발면에 한 끼도 못 먹었으니 한 끼라도 먹으려 했던 건데 그것조차도 먹지 못하고…그냥 대기하고 있다가 밥이라도 말아서 먹다가 출동하고 가려고 숟가락을 공구 속에 섞어가지고…밥도 못 먹고 몰아내고 아이가 무슨 규정을 어겼는지요? 우리 아이가 왜 그렇게 했는지요? 자기 임의대로 그렇게 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규정을 어긴 건 우리 아이니 우리 아이 책임이란 겁니까?

기자님들, 제발 우리 아이의 억울함을 꼭 밝혀주세요. 한창 멋 부리고 여친 사귈 나이에 억울하게 저들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원통하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정말 우리 아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운이 좋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료가 전화하길래 제가 얘기했습니다. 저희 아이가 죽은 건 이렇게 제가 여기서 원통함을 호소하는 시점에도 지하철이 2인 1조가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죽은 아이의 잘못이라고? 정말 엄마로서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을 해야 한다고 우리아이의 한을 풀 수 있다고 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자님들 제발 이 시점에서 우리 아이가 살아올 수 없죠. 3일을 못 봤는데 너무 보고 싶어요. 군대 간 거라고 유학 간 거라고 생각하며 살 수 있지만 군대 가면 휴가라도 나오고 유학가면 영상통화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평생 아이를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식구들 모두를 죽여 놓고 원통함을 풀 수 없게 우리아이의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들, 이 진실을 제발 알아주시고 저희 아이의 원통함을 제발 풀어주세요. 인터넷에 사고 당시 구의역 사진을 보여주는데 유리창이 다 깨져있고 앞이 다 피투성이더라구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이 차가운데서 꺼내서 보내줄 수 있도록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저희 아이 잘못이 아닌 거 다들 알고 계시잖아요. 정말 부탁드립니다.

19세 김씨가 사망한 진짜 이유

이후 시민들은 김 씨가 사망한 이유를 구조적인 차원에서 찾기 시작했다. 사회공공연구원 이승우 연구위원은 한 언론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김씨가 사망한 근본적인 원인은, 유리문 4개로 구성된 안전문에서 센서가 위치한 한쪽이 고정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정문 쪽 센서의 정비는 선로 쪽에서 밖에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김씨는 선로에 들어가서 작업을 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스크린도어의 한 쪽은 고정문으로 설계되었을까? 이는 민간자본 방식으로 안전문 시공과 광고 계약을 따낸 광고회사가 광고판 설치를 위해 강력히 주장한 설계 요소였다. 정부와 서울시는 공기업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공공교통시설의 일부인 안전문에서 광고수입을 만들기로 했었다. 그 결과 김씨와 같은 정비 직원은 위험을 무릅쓰고 선로 안쪽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돈의 논리 앞에 비상시 탈출구의 개념은 사라지고, 광고판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이승우 연구위원은 다음으로 서울시의 무리한 인력감축도 원인으로 지적했다. 고장이 잦은 설비를 더 적을 인원으로 정비를 하려다보니, 자연스럽게 속도가 우선이고 안전은 후순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일을 해야 휴식과 식사가 보장되는 구조였고, 그러다보니 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는 주장이다.

김씨와 같은 정비원들이 선로 쪽의 센서를 닦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0초’였다. 20초 동안 위험만 감수한다면 금방 해치우고 나올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속도를 우선시하는 동안 노동자들의 안전은 뒷전이 되었다.

김씨의 희생이 우리에게 남긴 것

김씨의 희생은 우리 사회에 비정규직 문제에 경종을 울렸다. 더 이상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한 국민들의 열망은 더욱 높아지게 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광표 소장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 번째는 노동유연화 정책을 폐기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기업살인법을 제정이다.

노동유연화 정책은 보통 업무를 외주화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구체적 사례로 한국도로공사의 경우 통행료 징수·단순 유지보수·안전순찰 업무를, 한국공항공사의 경우 소방기능·청원경찰·항공등화 업무를 각각 민간에 위탁하도록 했다. 서울지하철공사에도 외주화는 정부 정책으로 강요되었다. 2008년 서울메트로는 1만284명이던 정원을 유사기능 통폐합, 점검주기 조정, 아웃소싱과 민간 위탁 등의 이유로 9150명으로 줄였다.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전동차 경정비 등이 외주화되었다.

공공부문의 핵심 업무들이 경비 절감을 명분으로 민간부문으로 떠넘겨진 것이다. 정부는 지금도 외주화를 공공부문 경영효율화의 주요 평가지표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된 대로 경영효율화의 지표 속에는 노동자의 안전이라는 항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기업살인법 제정은 기업의 책임을 묻기 위한 제도적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들은 외주화를 통해 산재 위험의 부담을 하청업체에 떠넘기고 법적 책임에서 비켜나 있는 구조이다. 따라서 기업살인법을 제정해 원청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영국과 호주는 2007년과 2003년에 기업살인법을 도입했다. 과거에도 산업안전보건법으로 사업주를 처벌할 수 있었지만 기업살인법을 제정해 사고 책임이 있는 원청 사업주까지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영국은 산재 사망자가 10만 명당 0.6명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적다.

김 씨의 희생은 이렇듯 우리 사회 아직 남아 있는 노동권의 사각지대를 비추는 역할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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