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현대사] ⑥ 용산참사

2009년 1월 20일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 현장에는 경찰특공대와 소위 ‘철거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대치중이었다. 치솟은 불길은 사람들을 덮쳤고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용산참사라 불린다. 그리고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참사의 배경

용산참사의 근본적인 배경에는 서울시의 재개발 사업이 있었다. 철거민들이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 망루를 짓게 된 것은 재개발 사업에서 벌어진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 재개발 사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법률이 정한 바에 따르면 재개발 사업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우선 지방자치단체는 주거환경이나 기반시설이 낙후한 지역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한다. 다음으로 해당 지역의 토지 소유자들은 소유자들의 3/4 이상이 동의하는 조합을 설립한다. 조합은 시공사를 선정하여 계약을 맺고 사업시행계획을 수립한다. 그 후 관청의 허가 및 승인이 떨어지면 본격적인 철거 및 착공에 들어간다.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재개발의 과정은 차이가 있다. 우선 재개발 사업으로 수익을 얻으려는 업체들이 먼저 활동을 시작한다. 업체들은 재개발추진위원회 승인에 필수적인 주민 동의서를 대행해서 받기 시작한다. 재개발추진위원회나 조합 설립 과정은 업체와 연결된 토지 소유주들이 주도한다. 조합 설립 과정만 넘기면 인가까지 수월하게 흘러간다. 마지막으로 세입자들의 퇴거 및 이주가 남게 된다. 재개발 추진과정에서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저항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단계에서 발생한다.

용산에서의 재개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용산구청은 2006년 4월 20일 용산4구역을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한다. 10월 12일, 용산4구역 도시환경정비조합이 설립된다. 2007년 5월 31일 도시환경정비사업 시행계획이 인가된다. 같은 해 10월 31일 철거업체와 계약이 체결되고, 2008년 5월 31일 관리처분계획까지 인가된다. 정비구역 지정에서부터 관리처분계획 인가까지 대략 2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 와중에 세입자들의 처지는 점차 어려워졌다. 용산4구역의 세입자였던 정삼예씨는 “지역이 정비예정 구역으로 묶인 뒤 개발 기대감으로 주변 땅값이 많이 올라 계속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재개발 조합원들은 1인당 수억 원에 달하는 개발이익을 얻을 것으로 추산됐다. 반면 세입자들에게는 1600~2500만원의 보상금이 전부였다. 권리금도, 인테리어 비용도 한 푼 받지 못하게 될 처지였다. 세입자들은 재개발조합이 제시한 보상안을 거부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철거민의 농성과 진압결정

세입자들이 남일당 건물에 오른 것은 2009년 1월 19일 오전 5시 33분경이었다. 농성에 돌입한 인원은 용산 4구역 철거민들과 전국 철거민 연합회 회원 등 약 30여 명이었다. 이에 경찰은 경비 병력으로 약 300여 명의 경찰을 투입하였다. 하지만 1월 19일 오후에는 매우 평온한 상황이었다. 훗날 민변과 인권단체연석회의, 인도주의실천의사협회와 참여연대로 구성된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 진상조사단’(이하 진상조사단)의 조사결과 1월 19일 철거민 농성자들이 도로 및 일반 행인과 차량을 대상으로 화염병, 박카스병 및 벽돌을 무차별 투척하고 방화를 시도하는 행위는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진상조사단이 발간한 보고서에는 한강로 주변 상가 정모씨의 증언이 들어있다. “아침 빼고 나중에는 뭘 던지고 그런 건 없었다. 지장은 있었지만 그다지 위협적이고 그런 것은 첫날은 별로 없었다. 단지 경찰들이 반대쪽 차선은 통제시키고 하는 바람에 위에서 뭔가 던질까봐 안전상시민들을 통제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 날 첫날은 그다지 아침 빼고는 오후 3~4시경까지는 그냥 대치하다가 나머지 저녁 오후 늦게부터는 소강상태였다.”

농성장 주변의 상인이나 주민들은 화염병을 보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목격한 경우에도 극히 적은 수에 불과했다. 특히 염산이 든 박카스병을 목격한 주민은 전혀 없었다. 한 번의 화재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방화가 아니라 농성건물 뒤편에 있는 건물에서 쏘고 있는 물대포를 저지하기 위하여 화염병을 던지다가 잘못 떨어져 일어난 일로 확인되었다. 경찰이 물대포 공격을 중단한 1월 19일 오후 1시경부터는 별다른 투척이나 공방이 존재하지 아니하였고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철거민들이 농성을 시작한지 단 하루 만에 진압을 결정했다. 1월 19일 오전 9시경에는 경찰특공대의 투입이 결정되었다. 경찰특공대는 대한민국 경찰청 소속의 대테러부대로서, 경찰은 이미 19일 오전 9시부터 용산의 상황을 도심 테러 상황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경찰이 경찰특공대의 투입을 결정한 시각은 화염병이 등장하기도 전이었다. 화염병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경찰특공대의 투입을 결정하고도 2시간이 지난 후였다. 경찰은 농성 철거민들과 대화나 협상은 추진하지 않았고, 곧바로 경찰력을 투입한 강제진압에 들어갔다.

1월 20일 오전 6시 12분에 경찰은 철거민들에게 물대포 살수를 시작하였다. 6시 25분부터는 경찰병력이 건물 진입을 시작했다. 뒤이어 6시 45분 경찰은 컨테이너에 경찰특공대를 태워 옥상으로 올려 보냈고, 6시 56분 경찰특공대를 태운 컨테이너가 2차로 건물 옥상에 투입되었다.

대형화재와 참사 발생

7시 5분 망루의 3층과 4층 사이의 계단에서 1차 화재가 발생했으나 곧 진화되었다. 7시 7분에는 컨테이너에 탄 경찰특공대가 망루 해체작업을 시작했고, 7시 15분에는 컨테이너가 망루에 충돌하며 망루에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7시 20분 다시 망루에서 2차 화재가 발생했다. 망루에 있던 사람들은 탈출을 시도했고,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바닥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7시 45분경에 불이 붙은 망루가 무너졌고, 경찰특공대는 계속해서 옥상위의 철거민들을 체포했다. 8시 20분경 경찰특공대가 옥상에서 철수했고, 소방대원들이 옥상에 올라가 망루를 해체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시경 시신 5구가 발견되었다. 12시 20분경 시신 1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사망한 6명은 용산4구역의 세입자 2명,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함께하던 ‘전국 철거민 연합회’ 회원 3명 그리고 경찰특공대원 1명이었다. 또한 농성자 7명과 경찰 16명이 부상당했다.

이런 진압과정의 문제에 대해서 진상조사단은 “이 사건의 경우에 자진 하강의 유도나 위험물질의 소진 및 제거 등에 대한 진지한 노력이 선행되지 아니한 채 이미 진압 전날인 1월 19일에 농성자 진압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인화물질로 인한 화재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충분한 안전조치 없이 다량의 인화성 위험 물질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옥상 위 망루에 대해 토끼몰이식 진압작전이 강행되었다. 망루의 아래층에서 위층으로의 압박, 그리고 컨테이너를 통한 공중전으로 경찰특공대는 농성자들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였다.”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대형화재 발생 이전에 망루에서 이미 두 차례에 걸쳐 화재가 발생하여 대형화재의 가능성이 사전에 인지되었고, 따라서 망루 내 2차 진입 시에는 농성자들 검거에 앞서 망루 내에 있던 대량의 세녹스, 화염병 등 발화원 및 위험원의 제거 등 대형화재에 대한 안전조치를 취할 때까지 농성자들에 대한 공격적 진압을 중단하였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화재가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특공대가 진입하며 화재의 위험을 증대시킨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경찰특공대는 망루 안으로 진입할 당시 망루 안의 지지대를 제거하고 한꺼번에 망루 안으로 들이닥쳤고, 그로 인해 망루 2층과 3층의 바닥이 한가운데로 함몰되어 무너졌다. 이때 세녹스통과 화염병들이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등 인화물질이 유출된 것이다.

또한 경찰은 진압과정에서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도 드러났다. 당시 경찰의 진압계획서를 보면, “사전조치로 소방차 최대한 확보, 안전사고 대비 구급차 등 의료장비 대기, 동원경력에 대한 안전진압 등 교양철저, 투신대비 건물 하단에 매트리스·그물망 등 설치, 작전시 유의사항으로서 작전 개시전 안전매트·소방장비 등 장비확보, 안전대책 강구” 등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진압과정에서 이러한 안전계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인화성이 강한 물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화 장비가 없어 진화하지 못하고 대형화재로 이어졌다. 만약을 대비한 안전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용산참사에 대해 “안전수칙을 지키지 아니한 경찰의 위법한 과잉 진압이 주요 원인이었고 따라서 철거민의 사망에 대한 경찰의 업무상 과실치사상죄(설득과 대화과정 생략, 경찰특공대 투입요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찰력 투입으로 극단적 상황을 초래, 화재발생 물질 완전 소진 전 진압, 유류화재에 대한 미대책, 안전매트 등 안전장비 구비 없는 등 진압과정 안전조치 미실행)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국민의 분노

무려 6명이나 사망한 참사에 대해 정치권과 국민은 분노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정세균 국회의장은 “이명박식 공안통치가 빚어낸 참극”이라며 “참으로 참담하다. 지금 새해가 밝은지 얼마 안됐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박정희 시대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새벽에 마치 폭도를 진압하는 것처럼 공권력이 진입해서 무고한 시민을 살상했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며 “공안을 동원해 힘으로 밀어붙이면 모든 것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해왔다. 결과적으로는 무고한 서민들에게까지 죽음을 강요하는 사태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은 “용산 철거민들이 농성에 들어간 건 불과 만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면서 “농성이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특공대를 투입해 강제 철거를 하고 철거민들이 신너와 화염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경찰이 대책 없이 진압에 나섰다는 것은 고의적 살인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또한 “보통 철거민들이 농성에 들어가 요구하는 게 있으면 교섭하고 설득하며 또 그에 대한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합의해야 마땅한데, 이명박 정권은 ‘밀어붙이기’ 방식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국민적 합의라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진보연대 황순원 민주민권국장은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더군다나 원래 철거는 겨울철에는 안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명박 정권이 경제위기 상황에서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을 철거하는 것도 모자라 과잉진압으로 5명을 살해한 것에 비통함을 참을 수 없다”고 밝혔다.

20일 당일 저녁 참사 현장 앞에는 ‘’용산철거민살인진압대책위원회’ 주최로 1천5백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이명박 규탄 및 희생자 추모대회’가 열렸다. 이날 추모대회 참가자들은 “이명박 정부는 서민을 죽이는 살인정부”라고 규정하고 “앞잡이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의 즉각 파면”을 촉구했다.

집회 현장의 권성희씨(26세, 회사원)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다. 정말 너무하다.”며 “그저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들을 어떻게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냐”고 말했다. 촛불을 들고 인도에 서 있던 하경희씨(50세, 주부)는 “집에서 티비를 보고 있다가 답답해서 나왔다.”며 “정부는 없는 서민을 위해 일해야지 왜 사람을 죽이느냐. 없는 게 죄냐.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박오석(62세, 도봉구)는 “이명박 정부는 정말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사람을 죽이다니. 내 일이 아닌데도 너무 분하다”며 “태어나서 이런 정부는 처음 본다. 정말 이건 우리 국민을 무시하는 거다. 사람으로 보지 않는거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친구들과 함께 나왔다는 최민주씨(20세, 대학생)는 “정부가 독재시대로 돌아가려는 것 같다”며 “이명박은,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와 경찰의 여론조작

국민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경찰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우선 경찰은 조직적으로 여론조사를 조작하는 일을 벌렸다. 광주와 전남·경기·경남·경북지방경찰청이 소속 경찰관들에게 MBC ‘100분토론’이 진행 중인 인터넷 여론조사에 참여를 독려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100분토론’은 ‘용산 참사의 가장 큰 원인’으로 경찰의 과잉진압, 불법 과격시위, 재개발사업의 구조적 문제 등 3개 문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인터넷 여론조사를 벌였다. 이에 대해 광주경찰청은 산하 5개 경찰서 직원들에게 ‘용산 사건 관련 인터넷 여론조사 적극 참여 요망:문화방송(MBC) 100분 토론 시청자 투표’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한꺼번에 보냈다. 광주경찰청 관계자는 “경찰청에서 직접 전화로 인터넷 여론조사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해 와 일선 직원들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전남경찰청도 직원들에게 ‘문화방송 100분 토론 인터넷 여론조사에 전 직원 참여 부탁드립니다’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경찰청 내부 게시판에도 “용산 참사의 책임을 묻는 여론조사에 적극적으로 투표하자”며 해당 사이트를 직접 연결해 놓은 글이 여럿 올라왔다.

또한 국회에서 열린 용산 참사 긴급 현안 질의에서는 청와대가 용산참사를 무마하기 위해 여론을 조작한 것이 드러났다. 당시 경찰은 ‘경기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하였는데 이 사건을 전면에 보도하라는 지시를 한 것이었다. 처음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청와대는 이를 부인했지만, ‘오마이뉴스’가 청와대 공문 전문을 확보하고 공개하자 뒤늦게 시인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시는 국민소통비서관실 이성호 행정관의 개인적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정에서조차 묻혀 버린 그들의 목소리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 수사본부는 경찰의 진압에 대해서는 형사책임을 묻지 않았다. 반면에 망루 안 농성자 중 누군가가 던진 화염병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결론 내리고, 농성자 5명을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상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화염병 투척자를 특정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진상조사단의 확인 결과 사건 촬영 영상에서 망루의 불꽃이 보였으나, 화염병 불꽃은 추정일 뿐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았다.

기소된 사람들 중 한 명인 김창수 씨는 최후진술문에서 “용산참사 이후 철거민들을 테러집단, 폭력집단, 반정부단체라고 낙인찍은 경찰과 정치인들에 의해서 저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돕고 연대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저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동지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을 욕하지 말아 주십시오.” 라며 용산참사가 철거민에게 책임이 없음을 주장했다. 또한 “힘없는 철거민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국가는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가 된다는 말을 남겼다.

법정 다툼이 있었으나 대법원은 2010년 11월 11일 기소 철거민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약 1년 10개월 만에 사법부는 최종 확정 판결을 내렸다. 참사 이후 기소된 철거민들은 4년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경찰 특공대 1명의 사망사건에 대한 재판만 있었고, 철거민 5명의 사망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다. 정당한 공무집행이기 때문에 기소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검찰의 입장이었다.

이후 만기 출소한 이충연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산참사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부동산 문제와 맞닿아 있는 일이었다. 상위 10%가 전체 부동산의 절반 가까이를 갖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전세대란으로 고통받고 있다. 용산참사의 책임을 져야 할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되고, 뉴타운 공약으로 당선됐던 국회의원 중에 반성한 사람 아무도 없다.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용산참사를 잊지 말고 그 진실을 밝혀야만 한다.”

용산참사 그 이후

용산참사가 있은 후 한겨레신문은 그들의 삶을 추적했다. 그들 대부분의 삶은 강등되어 있었다.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시계방·식당·당구장·중국집·피시방 등을 운영하며 ‘사장님’ 소리를 듣던 23명 가운데 10명은 작은 공장에서 단순노동을 하거나 계약직 판매원, 경비원, 식당 종업원, 배달원이 됐다. 아예 직장이 없는 이도 7명이나 됐다. 건강이 노동을 허락하지 않는 이도 많았다. 6명은 점포를 새로 열었지만, 생활은 6년 전보다 어려워졌다. 자기 집에 살던 이는 전세나 월세, 임대주택으로 한 계단 또는 몇 계단씩 내려앉았다. 지상에서 살던 사람도 반지하로 내려갔다. 가족과 함께 살던 이들 가운데는 뿔뿔이 흩어져 홀로 사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용산참사의 책임자였던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2016년에 경주지역에서 20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다. 이에 용산참사 유가족들은 경주로 내려가 김석기 후보 선거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석기는 용산참사 책임을 아랫사람에게만 떠넘기면서 국민적 지탄 속에 공직에서 쫓겨나듯 내려온 사람”이라며 “이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된다면 경주시민에게도 모욕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용산참사 진상조사단 조사팀장이자 변호인이었던 권영국 변호사도 같은 경주 지역에 출마하며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김석기 후보는 용산참사 살인진압과 일왕 축하연 참석, 여론조사 조작 및 타후보 지지 호도, 석사학위 논문 표절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결격사유가 차고도 넘쳐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저버린 경찰 수장을 국회의원 후보로 낙점한다면 집권여당과 대한민국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선거 결과 권역국 후보는 20,253표를 얻어 15.9%의 지지를 얻었고, 김석기 후보는 57,276표를 얻어 45%의 지지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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