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국가 일본을 렌즈에 담아낸 심리 스릴러

[‘진보 오타쿠’의 일본 이야기]  영화 <라쇼몽(羅生門)>

▲쿠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1998)

일본의 영화감독. 1950년 작 <라쇼몽>이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떠올랐다. 그의 연출은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등 널리 알려진 영화감독들에게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전범국 민중의 불안한 심리를 담다

쿠로사와 아키라(黑澤明)라는 일본의 영화감독을 아시는지. 영화계에서는 ‘연출력 갑’ 세계적 거장이라는 평판인데,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본 분들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더구나 요즘 같은 디지털4D 시대에 1950년 작 흑백영화 <라쇼몽>을 불쑥 들이밀다니 (살짝) 걱정이 앞서지만 과감히 소개해 보련다.

이 영화는 한 살인사건에 대한 엇갈린 증언이 교차하는 심리 스릴러다. 또 1945년 태평양전쟁 패배 이후 일본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 ‘일본인 쿠로사와’의 의도가 진하게 묻어난다. 그렇다면 쿠로사와는 영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했을까?

영화는 등장인물이 서로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는 살인사건을 거울삼아 일본인의 불안하면서도 복잡한 심리를 담았다. 배경은 헤이안(平安)시대.(792년~1185년, 말기에는 천황 중심의 귀족정치가 몰락하고 사무라이가 권력을 잡는다) 혼란한 전란기라는 옛 광경은 패전을 맞닥뜨리고 갈피를 못 잡던 1950년의 일본과 맞닿아있다.

▲영화 속 라쇼몽. 라쇼몽은 헤이안 시대 일본의 수도였던 헤이안쿄(平安京, 현재 쿄토(京都))의 남문이다.

과거 헤이안의 영광을 상징했지만 이제는 폐허가 된 라쇼몽을 큼지막하게 보여주며 영화는 본격적인 막을 올린다. 유독 큰 피해를 입은 라쇼몽의 부서진 지붕기와는 미군전투기 B29의 공습을 받아 파괴된 수도 토쿄의 빌딩을 떠올리게 한다. ‘열강 대일본제국’의 처참한 붕괴를 보여주는 듯한 인상 깊은 장면이다.

등장인물은 ‘진상 규명’과 ‘진상 은폐’의 갈림길에 선 채로 우왕좌왕 한다. 화자로 등장하는 남성 3명(나무꾼, 평민, 승려)을 주목해 보자. 전후 평범한 민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다른 이에게 알려도 될까?”라는 딜레마에 휩싸인다. 특히 살인의 목격자인 나무꾼은 평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뜸을 들이고 고뇌한다.

당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속 시원히 밝히면 될 걸 왜 저리 고민하나’라는 의아함이 든다. 인물들의 미심쩍은 대화는 살인을 일제의 전쟁범죄에 대입하면 비로소 납득이 된다. 쿠로사와는 전쟁에 대해 공(功)을 주장하는 이들, 과(過)를 부각하는 이들, 별로 관심 없어하던 이들의 고민을 담아내려 했던 듯하다.

차례대로 왼쪽이 평민, 가운데가 나무꾼, 오른쪽이 승려.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어”라고 탄식하는 나무꾼의 하소연을 전해들은 평민은 “이 비는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다”면서 개의치 않고 살인의 자초지종을 풀어낼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승려는 이 두 사람을 조율하는 역할로 등장하지만 결국 진실을 욕망하는 정해진 수순에 뒤로 밀리게 된다.

나무꾼의 입을 통해 무대는 도적 타조마루의 시선으로 옮겨간다. 타조마루가 마사코(사무라이 타케히로의 부인)를 성폭행하는 계기가 묘사된다. (상당히 껄끄러운 소잰데 ‘여성을 겁박하는 남성’이란 주제가 남성 위주 영화계에서 흔히 활용되는 상황을 감안해 주시길) 지체가 높은 가문의 여성을 범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려는 시도. 다만 욕망의 서사는 단순히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타조마루의 결정적 계기는 ‘장막에 가려진 여성’이 바깥으로 드러난 순간, 즉 자신의 눈으로 마사코의 얼굴을 본 바로 그 때였다. 타조마루의 내면에 잠재해있던 ‘갇힌 욕망’이 얼굴이 드러난 아름다운 여성을 실제로 마주하며 비로소 ‘열린 욕망’으로서 발현된 셈이다.

마사코를 자신의 아내로 삼기 위해 마사코(가운데)의 남편 타케히로(오른쪽)와 대결하는  타조마루(왼쪽)

이후 타조마루는 마사코를 타케히로로부터 ‘빼앗고자’ 목숨을 건 진검 승부를 펼치려 한다. 하지만 서로 도망치고 헐떡이는 꼴불견 싸움이 벌어지더니 타케히로는 어이없게 숨진다. 관아에 붙들린 타조마루는 과장된 몸짓을 보이고 ‘자신은 당당하게 싸웠다’며 거짓을 말한다. 관아에서 재판을 받는 타조마루의 태도는 극동군사재판정에 서 끝내 죄를 뉘우치지 않은 A급 전범들을 떠올리게 한다.

타조마루는 여성(마사코)을 차지하려는 목적의 명예롭지 않은 싸움 끝에 살인을 저질렀다. 그래서 사건의 내막이 밝혀질까 전전긍긍 했고 용감히 싸웠다고 떠벌렸다. 하지만 현장을 고스란히 숨어 지켜본 나무꾼에 의해 거짓이 들통 난다. 거칠 것 없는 자유롭고도 터프한 남성(도적)으로 세를 떨치던 타조마루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한 침략자 일제의 끝 모를 추락이라 하겠다.

뒷맛이 찝찝한 여운, ‘그래도 뭐 어쩌겠어?’

종합하자면 쿠로사와는 ‘살인의 진상규명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주제로 내세우며 전범국 일본을 직접 비판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둘 중 살아남은 남자를 따르겠다’는 마사코를 통해서 ‘전쟁을 지지하던 일본인과 전쟁을 지지하지 않던 일본인’의 양 입장을 저울질하는 모습을 강조하며 살인(전쟁)의 본질을 희석하려 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얄궂게도 “난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믿고 싶지 않아”라고 외치며 아기를 버린 부모가 자식의 몫으로 남겨둔 재물을 휙 챙겨 라쇼몽을 떠나는 평민의 솔직한 시선만큼은 유독 강력하게 느껴진다. 살인의 진상을 알게 된 평민은 ‘믿고 싶지 않다’며 현실부정을 선택했다. 군국주의 시기 전쟁에 동참했다는 원죄에서 벗어나 주위에 아랑곳없이 살아가겠노라는 무책임한 선언에 가깝다.

쿠로사와가 제시한 ‘새로운 일본상’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뚜렷하게 역설된다. 나무꾼은 살인사건의 현장을 보고도 제대로 밝히지 못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속죄의 차원에서 아기를 키울 것을 다짐한다. 해가 비치는 라쇼몽이 부각되고 평민과 나무꾼의 시선이 얽힌 모호한 일본상이 관객 앞에 펼쳐지며 이야기는 끝난다. 억수 같던 소나기는 그쳤지만 앞날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채로.

라쇼몽에 버려진 아기를 자신이 키우겠다며 안고 떠나는 나무꾼

살인을 저지른 타조마루의 꼴사나움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급하게 마무리되는 결말이라니 참 찝찝하기 그지없다. 일제의 전쟁범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철저한 반성을 주저한 쿠로사와. 아마 그의 시선은 평민에 쏠려있지 않았을까?

일제의 과오는 한국에서 곧잘 비판받는다. 하지만 그동안 개별 일본인들이 침략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는 관심을 잘 두지 못했던 것이 사실. 관심 있는 여러분은 <라쇼몽>을 본 뒤(한국에서는 2001년 저작권 제한이 풀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무료로 볼 수 있다) 영화의 탄생비화가 담긴 책 <복안의 영상>을 한번 손에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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