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현대사] 장면 ① 대한민국에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다

“이건 저랑 제일 친한 친구 이야기인데요. 친구네 아버지가 회사 최고 직위 사람이어서 집이 되게 잘 살았어요. 4층짜리 빌라가 있었는데, 그 건물 전체가 걔네 거였어요. 그런데 IMF 때문에 회사가 망한 거죠. 그래서 할아버지네 집에 빌붙어 살았어요. 친구가 하는 말이 자기 어릴 때 프라모델 좋은 거 진짜 많았는데, IMF 되고 나니까 집이 망해서 다 팔아야 했다고 하는 거예요. 걔가 지금도 힘들게 살고 있어요.” (K, 96년생 대학생)

이것은 제일 친한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와 IMF 구제 금융 사태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크게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8,90년대에 태어난 이들이 알고 있는 한국의 모습은 바로 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와 IMF 구제 금융 사태로부터 만들어 졌다고 볼 수 있다.

IMF란 무엇인가

이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우선 용어 정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지칭하는 용어가 워낙에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IMF 경제 위기’, ‘IMF 외환 위기’, ‘IMF 환란’, ‘IMF 관리체제’, ‘IMF 시대’, ‘IMF 사태’ 등등이 있다. IMF는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약자로서, 우리말로 직역하면 ‘국제 통화 기금’이 된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돈을 각출해서 계를 만드는 것과 같다. 계속 쌓이는 곗돈은 그냥 두는 게 아니라, 사정이 어려운 회원국에게 빌려준다. 그리고 빌려준 돈은 어떻게 해서든 되돌려 받기 위해서, 회원국의 경제 방식에 개입을 한다. 낭비되는 지출은 금지시키고, 돈을 더 많이 벌어 올 수 있게 경제 운영을 강제하는 것이다.

IMF에서의 의사결정과 운영은 독특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를 할 때, 1인당 1표씩 행사한다. 누구나 1표씩 행사하는 평등선거 원칙 때문이다. 그런데 IMF에서는 1원당 1표라고 생각하면 된다. 즉 돈 많이 낸 회원국은 그 만큼의 표를 행사할 수 있다. 곗돈 100만원 낸 나라는 100표, 만원 낸 나라는 1표를 행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의사를 결정할 때 전체 85%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점이다. 즉 하나의 회원국이 15% 이상의 지분을 가진 경우, 그 하나의 나라만 거부하면 의견을 통과시킬 수 없게 된다. 거부권을 가진 나라는 2016년 현재 16.61%의 쿼터를 가진 미국이 유일하다.

우리나라는 97년에 IMF로부터 돈을 빌렸다. 그리고 그 대신 IMF가 제시하는 대로 우리나라 경제 정책의 상당 부분을 바꾸었다. 따라서 이 사건을 ‘IMF 구제 금융 사태’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우리가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는 것이 바로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이다. 1997년에 외환 위기가 왔고 그래서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 것이 전후 관계이다.

중요한 것은 ‘IMF 구제 금융 사태’ 전과 후로 우리나라의 모습은 정말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실업률 증가, 자살률 증가, 출산율 저하, 양극화 심화 등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래프에서 확인 할 수 있겠지만 거의 모든 지표가 1997년과 1998년에 급격한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청년실업률과 실업률 그리고 양극화의 지표인 지니계수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대환란의 첫 번째 조짐

국가적, 세계적인 대환란이 있기 전에는 항상 전조가 있기 마련이다. 중세나 판타지 세계에서는 난데없이 혜성이 떨어진다거나, 기이한 동식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환란의 출발은 우리에게서 먼 곳에서부터 나타났다. 다만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첫 번째 조짐은 바다 건너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가 되면서 미국은 ‘쌍둥이 적자’를 맞이한다. ‘쌍둥이 적자’란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가 함께 겹쳐오는 것을 말한다. 수입과 수출 등 무역을 통해 흑자나 적자가 나는 것을 경상수지라고 하는데, 수출보다 수입을 많이 했다는 뜻이다. 또한 정부의 수입과 지출 중에서 지출이 더 많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재정수지 적자이다. 당시 미국 쌍둥이 적자의 원인은 베트남 전쟁에 막대한 군비를 지출한 것, 제조업의 쇠퇴 그리고 석유파동 등이었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적자가 나게 되면 보통 나라의 경제에 좋지 않다. 국고에 돈이 비어가는 상황이니 좋을 리가 없다. 당연히 미국 정부와 미국 기업들은 이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 기업은 주변국들에게 시장을 더 개방하기를 요구했고, 미국 기업 또한 제조업 부문에서 금융과 서비스업 부문으로 옮겨갔다.

한국이야 미국과 가까운 나라였으니,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경제 연구원에서 작성한 『한국 역대정권의 주요 경제정책』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수입자유화 정책은 계속되었다. 이는 국제무역환경이 한국이 보다 신축적인 수입정책을 강력히 요구한 데서 오는 불가피한 대책이었다.’ 1985년 7월에는 국제경쟁력을 보유한 품목과 국내 생산이 불가능한 비경쟁 품목 등 총 235개 품목을 수입하기로 했다. 1986년 7월에 타결된 한미통상협상의 내용은 ‘미국의 국내 생명보험시장 진출 허용, 국내 소비의 1%의 범위에서 외국산 수입 허용’등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노태우 정권이 되어 국내의 자본시장이 개방되었다. 일반 외국인의 직접증권투자를 허용하고, 외국 증권사의 국내 지점 설치를 허용하였다. 이로써 노태우 정권은 한국 주식 시장을 최초로 개방한 정권이 되었다.

대환란의 두 번째 조짐

두 번째 조짐은 보다 가까운 곳에서 나타났다. 바로 동아시아였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팟타이와 똠얌꿍으로 유명한 태국이었다. 태국은 1980년대에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그러나 1992년부터 정치가 안정되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추구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채택한 정책이 바로 자본자율화였다. 이렇게 외국 자본 유입의 통로를 열자, 다량의 외국자본이 태국으로 유입되었다.

갑자기 한 부문에 자본이 집중되어 돈이 몰리게 되면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두고 보통 거품이라 부른다. 흔히들 버블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역시 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자본유입에 따른 버블이 형성되었다. 특히 태국에서는 부동산에 과잉투자가 계속되어 버블이 형성되었다. 태국정부는 손 놓고 볼 수만 없었으므로, 1994년과 1995년에 긴축적인 금융 정책으로 전환한다. 그러자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동산 개발 회사들이 파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동산 개발 회사만 망하면 문제가 없는데, 더 큰 문제는 그 회사에 돈을 빌려준 회사들이었다. 부동산 회사들에 돈을 빌려주던 금융회사들까지 부실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국에는 진짜 큰 문제가 시작되었는데, 바로 국제투기자본의 공격이었다. 사실 국제 자본시장은 정글과도 같은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 충실히 살아가는 경제 주체들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보이는 곳이다. 그 곳에는 나름의 질서를 잡으려는 세력도 있지만, 국적도 색깔도 모호한 국제투기자본이라는 세력도 존재한다. 태국이 바로 국제투기자본에 당한 케이스였다. 당시 태국은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때문에 태국의 통화인 바트화가 상대적으로 고평가되어 있다는 인식이 퍼졌는데, 이것이 국제투기자본의 목표가 된 것이다. 1996년 12월 바트화에 대한 1차 투매, 1997년 2월에 두 번째 공격, 1997년 5월 14일과 15일에는 심각할 수준의 투기적 공격이 일어났다.

그 결과 경제위기는 태국의 주변국으로 확산되어 갔고, 인도네시아, 대만, 홍콩 등의 경제도 어려워 졌다. 태국은 우리보다 빠른 1997년 8월 11일에 IMF로부터 172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았다. 이것이 우리나라와 관련이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돈을 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은행들은 국제금융시장에서 단기 대출을 얻고, 동남아에는 그 돈으로 장기 대출을 해 주었다. 그 시세 차익인 2~3%의 수익을 올리며 돈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남아로부터 돈을 회수할 수 없게 되자, 국내에 있던 외화가 유출되었다. 위기는 점차 우리나라를 향해 오고 있었다.

IMF 구제 금융 사태의 첫 번째 단계

IMF 구제 금융 사태는 크게 3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국내의 재벌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을 했던 1997년도 초부터 정부가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 11월 21일까지이다. 둘째로 IMF가 한국에 구제 금융을 하는 조건을 협상했던 시기부터 12월 24일 정부가 IMF의 요구를 받아들일 때까지 이다. 마지막으로 김대중 정권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하던 시기로부터 2001년 8월 23일 IMF 관리체제가 끝날 때까지이다.

첫 번째 단계의 시작은,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이라는 회사의 부도처리였다. 뒤이어 1월 30일에는 무려 5조 7000억 원에 달하는 부실 대출을 남긴 채, 재계 14위의 한보그룹이 부도처리 되었다. 3월 20일에는 삼미 그룹이 부도를 맞았다. 4월 22일에는 소주로 유명한 진로그룹이 부도를 맞았다. 7월 15일에는 기아그룹이 사실상 부도를 맞았고, 10월 15일에는 쌍방울그룹이 부도처리 되었다.

뭔가 회사 이름이 낯 설수도 있지만 당시 저 기업들은 한국에서 잘나가던 소위 재벌들이었다. 이런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던 이유는 재벌들의 방만한 경영 탓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쉽게 말해 각 대기업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적자가 나도 개의치 않고 무리하게 운영했다는 것이다. 또한 김영삼 정부는 OECD가입을 위해 대외개방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한 탓도 있다. 그러는 과정에 국내 산업 정책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재벌은 투자 결정에 대해 정부의 통제나 금융기관의 감시도 받지 않는 공백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회사가 막대한 부도를 내고 도산하게 되면, 가장 큰 문제를 느끼는 곳은 그 회사에 돈을 빌려준 국내 은행들이다. 그 국내 은행들도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서 다른 기업들에 돈을 빌려주는 처지였다. 그런데 은행이 빌려준 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되면 그 은행에 자금 압박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첫째로 국내 은행은 외국에서 ‘달러’를 빌렸다는 점과, 둘째로 국내 은행은 외국에서 ‘단기’로 돈을 빌렸다는 점이다. 즉 ‘통화 불일치(currency mismatch)’와 ‘만기 불일치(maturity mismatch)’로 인해 우리나라는 달러화가 부족한 위기인 ‘외환 위기’로 몰리게 되었다. 이를 ‘이중 불일치(double mismatch)’라고 한다.

1997년 후반부가 되면서 우리나라는 이중불일치 속에 급격한 유동성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주일 후에 받을 돈이 있는데, 갚아야 하는 빚은 당장 내일인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고 생각하면 쉽다. 한국의 상환능력에 의심을 가진 외국계 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동안 돈을 잘 빌려주던 외국계 은행들이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고 압박했다. 쌓아두었던 달러는 점차 말라가고,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1996년에는 126억 달러를 빌렸는데, 1997년에는 148억 달러를 갚았다. 즉 1년 사이 270억 달러의 자본이 국외로 빠져나갔다. 단기 외채의 규모는 아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 단기외채는 약 600억 달러 규모로서 전체 외채 중 58%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때쯤에도 아직 국내에서는 위기가 닥칠 것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김영삼 대통령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어느 곳에서는 우리의 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한국의 외환보유고 대비 단기 자본 비율은 어느 신흥국가보다 높으며 최근 한보와 기아그룹 사태는 이미 취약한 은행 시스템의 긴장을 높이고 있다.(97년 8월 5일)”, “외환보유고 대비 단기부채가 막대한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해외은행이 신용공급을 중단하면 유동성 부족에 직면할 수 있다.(97년 9월 4일)”, “한국의 단기부채는 외환보유고의 250퍼센트 이상으로 추정된다.(97년 10월 21일)”, “투자자들은 태국에서의 투자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아직 가치가 있는 한국의 주식들을 팔아치울 수 있다.(97년 10월 21일)” 죄다 미국 CIA의 비밀문서 속에 있던 말들이다. 미국 CIA는 한국의 위기가 한국 자체가 가지는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유동성 문제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미 9월에 말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사안의 심각성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11월 10일인 것에 비한다면 놀라운 정보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황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고, 남은 길은 결국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1997년 11월 21일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IMF에 구제금융신청을 했다는 발표를 했다. 다음날인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구제금융 신청에 관한 대국민 특별 담화문을 발표한다.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에게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입니다.”는 내용과 “고도성장 그 자체가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IMF 구제 금융 사태의 두 번째 단계

이제 IMF 구제 금융 사태의 두 번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으니, 이제 그 조건과 규모를 협상할 차례였다. 대통령의 특별 담화문이 발표된 다음날인 11월 23일 IMF의 실무협상단이 김포공항으로 입국했다. 앞서 서술한 대로 IMF는 돈을 빌려주는 대신 그 나라 경제 정책에 개입을 한다. 우리의 요구조건은 당연히 외채 상환에 필요한 달러를 빌리는 것이었다. IMF의 요구조건은 금융부분 개혁, 긴축통화정책, 한국 시장개방조치 등이었다. 협상은 잘 진행되는 듯 했으나,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IMF가 돌발적인 카드를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IMF가 꺼내든 카드는 ‘부실금융기관의 퇴출’이었다. 한국 측에서는 예상치 못한 요구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협상이 완료되기도 전인 12월 2일, IMF의 요구조건을 실행에 옮긴다. 재정경제원은 9개 종합금융사에 대해 영업 정지 명령을 내렸다. 당시 일반 국민들은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이 문을 닫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저축만 하면 부자가 되고 나라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깨졌다.

놀라운 일은 이 협상에 관여된 세력이, 우리나라와 IMF뿐 아니라 하나가 더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경제부총리이었던 임창열은 이렇게 증언한다. “처음에 IMF 협상이 시작될 때 주한 미국 대사가 저에게 요청을 하더라고요. ‘IMF 협상 할 때 미국 정부 대표가 와서 참관해도 되겠냐?’ 그래서 저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립튼 차관이 와 있더라고요. 나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미국대사도 내가 거절한 내용이니까 나한테 이야기 하지도 않더라고요.” “그러나 협상과정에서도 나이스 단장이 나하고 합의해 놓고도 나중에 말이 바뀌는 경우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하고 협상하면서도 나이스 단장이 미국 측하고도 조율을 하면서 협상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당시 립튼 미국 재무부 차관은 IMF와 본격 협상이 진행될 때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더군다나 IMF 협상 팀과 같은 호텔에 묵었다. 립튼의 방은 10층 IMF협상단의 방은 19층이었다. 결국 협상은 미국 정부의 뜻이 대부분 반영된 채로 타결이 되었다.

12월 3일 미쉘 캉드쉬 IMF 총재가 한국에 왔다. 그리고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하고,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후 문제가 해결되면 좋았겠지만,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만 흘러가지 않았다. IMF에서 돈이 들어오는 속도보다, 단기 외채가 연장이 안 되고 회수 당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12월 18일에는, 우리가 빚진 단기 외채 중에 만기가 되어 연장되는 비율이 5%로 떨어졌다. 22일 아침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연말 외환 보유액이 마이너스 6억 달러에서 플러스 9억 달러로 예상된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가 부도 사태가 열흘 정도 남았다는 보고였다. 상황은 그만큼 심각했다.

우리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12월 18일 15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김대중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라는 의의도 중요했지만, 김대중 당선자가 급하게 해야 했던 일이 따로 있었다. ‘오전 9시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 회견을 가졌다. 나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제 신인도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새 정부는 IMF와 현 정부가 합의한 사항을 충실하게 지키겠다고 밝혔다.’ 국제 시장에 한국 시장에 대한 신뢰감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은 19일 미국으로 특별대사를 파견했다. 특별대사는 미국의 재무부 부장관과 면담을 가졌다. 한국에 추가 자금을 지원하고 채무 만기를 연장하는 대신 정리해고제 등 노동시장 유연화와 자본시장 전면 개방을 하는 협상이었다. IMF 협상에는 없던 추가적인 내용이었다. 22일 립튼 미 재무부 차관은 이러한 내용을 대통령 당선자에게 확인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다.

그 당시의 상황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나는 어찌하면 미국이 우리를 돕겠냐고 물었다. “미국은 ’IMF 플러스(추가합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또 그 핵심 내용이 대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정리해고제 수용,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집단소송제 도입 등입니다.” 모두 지난 12월 3일 IMF와 맺은 협약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우리에게 당시의 협약 이상의 개혁적 조치를 요구하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나는 정리해고제 도입에 대해서는 선거 기간 동안에 2년간 유예를 약속했었다. 만약 이를 수용한다면 노동계의 반발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몇 십만 명의 실업자를 구하려다 4천만 명이 살고 있는 나라 전체가 부도를 맞을 수는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립튼 차관과 보스워스 주한 미 대사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22일 오전 11시 30분 여의도 국민회의당사에서 만났다. 립튼 차관은 거듭해서 김대중 당선자에게 물었다. 이 합의 내용을 지지하는지 말이다. 김대중 당선자는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협상이 끝이 났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IMF로부터 100억 달러를 조기 지원한다는 통보가 왔다. 미국 정부는 자국의 은행을 설득해 한국의 부채 만기 연장을 이끌었다. 그렇게 국가 부도의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의무는 아래와 같았다.

한국 정부와 IMF 간에 이행각서의 주요 내용

◦재정금융 긴축 및 시장금리 상승 허용

◦금융개혁 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와 부실금융기관의 구조 조정

◦무역 및 자본자유화 가속화

◦결합재무제표 공표 및 기업 재무제표의 투명성 제고

◦재벌 계열사 간 상호 채무보증 관행 개선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의 과도기적 인상과 궁극적 폐지

◦채권시장 완전 개입

◦단기 금융상품 개방일정 수립

◦이자제한법 폐지

◦무역보조금 폐지

 

 

IMF 구제 금융 사태의 세 번째 단계

급한 불은 껐지만 남은 의무의 이행과정은 가혹했다. 정부는 규모의 축소, 기업에는 구조조정, 민간에는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의무가 닥쳤다. 빚을 갚기 위해 수익을 늘여야 했고, 지출은 최대한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이른바 4대 개혁이라는 것을 추진한다. 4대 개혁은 공공부문, 기업, 금융 그리고 노동계에 대한 개혁이었다. 이 중에 공공부문의 개혁은 정부 산하의 공기업들을 민영화 하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외채를 갚기 위해서는 공기업을 팔아야한다는 논리의 귀결이었다. 당시 민영화를 추진한 공기업의 비중은 아래의 표와 같다. 전체 공기업이 26개 있었고, 그 중에 11개가 민영화 대상이었다. 자회자를 포함하면 52개의 공기업이 민영화 대상이었고, 이는 전체 중에 42% 달하는 규모였다. 당시 민영화가 추진된 기업은 후에 포스코가 된 포항종합제철, 두산중공업이 된 한국중공업, KT가 된 한국전기통신공사, KT&G가 된 한국담배인삼공사 등이 있다.

김대중 정부는 공기업을 민영화함과 동시에 대기업들에도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1998년 12월에 5대 그룹(현대, 삼성, 대우, LG, SK)과 정부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개혁안이 합의 되었다.

구조조정 추진방향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계열사 정리

◦자동차, 반도체, 석유화학, 철도차량, 항공 등 과잉중복투자분야 조정 재무구조 개선방향

◦2000년 말까지 계열사 및 자사매각과 국내외 주식발행 등으로 총 251억 6,900만 달러의 외자조달과 45조4천억 원의 내자 확충

◦2000년 말까지 구조조정을 통해 32조7,700억 원 자산 감축

 

일반적인 구조조정이라는 것은 사업축소나 통폐합 혹은 기업의 군더더기 자산을 정리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하지만 당시의 구조조정은 이후 알아 볼 노동시장 유연화와 맞물려, 정리해고와 직결되었다. 이른바 명예퇴직 혹은 희망퇴직과 같은 용어가 등장한 것이 이때부터이다. 1998년 당시 실업자는 130만 명에 육박했고, 대한민국은 고실업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체감실업률’을 10.5%로 계산하기도 했다. 이는 정부 공식 실업률인 6.5%보다 4% 높은 수치였다. 그 와중에 97년 재계순위 4위였던 대우는 그룹이 완전히 해체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2016년 기준으로 보자면 5위를 SK가 6위를 LG가 차지하고 있는데, 지금의 SK나 LG가 해체되는 정도의 규모였다고 볼 수 있다.

노동시장이 유연화 된다는 것은 고용과 해고가 보다 용이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정점은 정리해고였다. 원래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은 정당한 이유 없는 해고는 못 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노동자가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해고를 한다면, 이는 부당해고가 된다.

하지만 정당한 이유가 없더라도,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정리해고다. 1998년 2월 6일 노사정 대타협은 정리해고의 길을 열어주었고, 2월 20일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정리해고가 가능하게 되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근로기준법 24조 1항은 다음과 같다. “사용자가 경영상 이유에 의하여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 이 경우 경영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의 양도·인수·합병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사업의 인수 합병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되고, 이 과정에서 근로자들을 정리해고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된 것이다. IMF 이후 저 조항은 계속해서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되는 근거가 되었다.

국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의 시장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1998년 12월 18일에는 18억 달러를 처음으로 상환했다.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차관을 모두 갚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드디어 2001년 8월 23일 IMF 구제 금융 사태는 모두 종료되었다. 하지만 IMF 구제 금융 사태는 한국의 많은 것을 이미 바꾼 뒤였다.

 

IMF 구제 금융 요청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나?

나라가 도산위기에 처한 때 우리나라 정부는 몇 가지 선택을 할 길이 열려 있었다. 먼저 정부가 고려한 방법은 미국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KBS에서 방영한 시사기획 쌈에서는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임창열이 이렇게 증언한다. “제가 97년 11월 19일 부총리 취임을 한 바로 다음 날, IMF 부총재하고 당시 미국 재무부 차관보 가이트너씨가 루빈 장관의 특사 자격으로 저를 만나러 왔어요. ‘양자 간의 지원은 어렵습니다. IMF를 통해서만 도와드리겠습니다. IMF 지원 요청하면 적극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양자 간의 지원은 어렵습니다.’는 분명한 메세지를 저한테 준 거예요.” 이어 립튼 당시 미 재무부 차관이 작성한 비밀문서에서도 드러나듯 미국은 애초에 양자 지원의 방침은 없었고, 오로지 IMF를 통해서만 지원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방안은 급한 대로 옆 나라 일본에게 도움을 청해보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IMF의 아시아판인 AMF(Asia Monetary Fund)를 구성할 의도가 있었다.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긴급 차관을 끌어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1997년 12월 우리나라 경제부총리가 일본으로 날아갔을 때 일본의 미쓰즈카 대장상은 한 통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한국 문제는 IMF 틀 내에서 처리할 테니 일본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루빈 미 재무장관이 보낸 편지였다. 이렇게 두 번째 방법도 무산이 되었다.

마지막 방법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멋있는 용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말로 하면 ‘채무지급유예’ 정도로 할 수 있고,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배 째라’는 말이다. 지금 당장 갚을 돈이 없으니 부채를 탕감을 하든, 상환을 연장하든 알아서 하라는 태도로 나가는 방안이다. 실제 당시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한다는 쪽에서는 대개 IMF 사태의 근본 원인이 IMF나 국제 투기자본의 횡포에 있다고 봤다. IMF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외환위기에 그릇된 방식으로 과도하게 개입해 단기 유동성 부족의 위기를 확대재생산했고, 국제적인 투기자본의 횡포로 각국의 외환위기가 구조화됐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이 방안을 무시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최성진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 정부나 주류 학계가 사태의 원인을 다각도로 검토하지 않고 무작정 ‘내 탓이오’를 외쳤던 이유는 ‘IMF 비판론’이나 ‘외부 조건론’이 곧 ‘미국 음모론’과 맞닿을 수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 탓으로 보인다.” 즉 당시 경제 관료들이 미국에 대해 싫은 소리를 내는 것을 불편해 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IMF가 우리에게 남긴 것

IMF가 우리에게 집요하게 요구했던 것이 바로 자본시장 개방이었다. 한국이 그 요구를 수용한 지 20년이 되어가는 지금 이 시점에 외국 자본은 과연 얼마큼 우리에게 가까이 있을까? 위 그림은 2016년 6월 현재 시가총액 상위15개 종목의 현황이다. 물론 시장에서 매일 거래되기 때문에 외국인 비율은 그때마다 달라진다. 하지만 외국인 비율이 50%를 넘는 종목이 6개나 있다. 은행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주요 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이 50%를 넘기면서 사실상 우리나라 자본구조가 외부에 종속되었다.

IMF는 일반 국민에게 큰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하루에 1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기업체 1000개가 하루에 문을 닫았다. 공기업의 민영화, 대기업 구조조정 그리고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인해 수많은 가장이 직장을 잃었다. 우리나라가 사상 최악의 실업사태를 겪은 것이 바로 이때였다. 정리해고 당한 회사원들이 가족들에게 제대로 이야기 하지 못하고, 아침마다 출근 복장으로 나와 공원을 배회한 것도 이때였다. 그리고 생활고로 인한 자살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뉴스가 매일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국민들은 외채를 갚기 위한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른바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전국에서 무려 350만 명이 226톤의 금을 내놓았다. 당시 시세로는 21억 5000만 달러어치이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가 빌린 총 금액은 195억 달러이었던 것에 비하면 수치적으로 크지는 않았다. 결국 금 모으기 운동은 IMF 구제 금융 사태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정치적 행위였다는 비판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IMF가 남긴 것 중에 정말 심각한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긴 상처다. 한국인은 IMF 구제 금융 사태 이후 급속히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다음의 통계 자료를 보면 보다 심각성을 느낄 수 있다. OECD 국가들 간에 지표를 비교한 2009년의 자료이다.

항목 순위
소득 격차 2위
국채 증가율 1위
세부담 증가율
저임금 노동자 비율
근로 시간
노동 유연성 (해고의 용이성)
비정규직 비율
산재사망자
식품물가 상승율 2위
사교육비 비중 1위
이혼율
자살률
출산율 꼴지

IMF를 겪으면서 한국인들은 두 가지 뼈저린 교훈을 체득했다고 한다. 하나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냉혹한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경제의 미래가 너무나 불확실하다는 신념이었다. IMF는 한국 시장을 개방하면서,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겼지만 그들이 입을 상처까지 고려하지는 않았다. 고용이 불안해지고, 사회안전망이 무너지면서 한국 사람들은 서로 간에 생존경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통계수치가 보여주듯, 그 생존경쟁에서 탈락하는 것은 실질적인 생명의 위협이 되고 있다.

 

보론 자본자본의 세계화

97년의 역사를 보다 깊게 보기 위해 알아야 할 개념이 있다. 바로 ‘자본’과 ‘자본의 세계화’라는 개념이다. 97년 한국의 국민들이 겪었던 소위 ‘IMF사태’라는 것이 자본의 세계화 과정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자본이라는 것은 ‘스스로 불어나는 가치’ 혹은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고 말하곤 한다. 다시 말해 자본이란 계속해서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종자돈, 기계 설비 혹은 공장과 같은 구조물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자본은 화폐자본, 생산자본, 상품자본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꿔 순환하며 스스로의 몸집을 부풀려간다. 마치 눈덩이를 굴리면 굴릴수록 그 덩치가 커지는 것과 같다. 이런 과정을 자본의 ‘확대 재생산’이라고 한다. 자본이 순환 할 때마다 새로운 가치가 생산되고, 그 가치가 더해져 계속 몸집이 불어난다.

문제는 이렇게 덩치가 커지는 자본이 국경의 한계선을 넘기 시작했던 시점에 벌어졌다. 자본이 한 국가의 국경선을 넘어 전 세계로 확대되는 과정을 ‘자본의 세계화’라고 한다. 자본의 세계화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가능했다. 그것은 온라인 거래기술의 발전과 각 나라의 시장에서 외국인의 자유로운 거래가 가능한 것이었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시장’은 우리가 동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전통시장이 아니다. 바로 자본이 오고가는 채권, 주식 등의 금융시장을 말한다. 동네 전통시장에서는 현금만 잘 내면 외국인도 장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금융시장은 외국인이 너무 많이 들어와 거래를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므로, 각 나라들은 보통 일정한 정도의 제한을 만들어 규제를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점차 그 규제를 푸는 나라가 생겨났다.

1990년대가 되면 세계적으로 두 가지 조건을 갖춘 지역이 본격적으로 늘어난다. 드디어 자본이 랜선을 타고 외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책에서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은 아주 기발하고 재치 있는 표현으로 이런 모습을 표현했다. 바로 ‘전자 소떼’라는 표현이다. 아프리카 넓은 초원에 수천마리의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가, 일제히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직접 본 적은 없더라도, TV나 YouTube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 소떼가 전 세계 곳곳을 랜선을 타고 내달리고 있다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리로 우르르 몰려갔다가, 또 갑자기 저리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런 소떼를 떠올려보면 된다. 그리고 화난 소떼가 우리나라를 짓밟고 지나간 사건이 바로 97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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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와 한상균

쌍용자동차는 IMF 구제 금융 사태를 거치면서 직격탄을 맞은 기업이다. IMF 구제금융사태의 나비효과는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 그 과정의 끝에 한상균이라는 사람이 있다.

97년 쌍용자동차는 심각한 경영난을 겪었다. 그 결과 98년 대우자동차는 쌍용자동차를 인수한다. 하지만 본문에 서술한 대로 대우 그룹이 해산되면서 채권단의 관리에 들어간다. 채권단이 관리하던 시기에 쌍용자동차는 일정정도 경영이 정상화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채권단이 관리할 수는 없었으므로, 새로운 인수 기업을 찾게 된다. 그 기업이 바로 중국의 상하이자동차라는 기업이었다. 상하이자동차가 ‘기술유출 먹튀’를 할 것이란 우려에도 불구하고 2004년 쌍용자동차는 상하이자동차에 인수된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쌍용자동차는 다시금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했다. 2011년 이번에는 인도 자동차 기업인 마힌드라사가 인수했다. 2016년 현재 인도의 마힌드라사는 쌍용자동차 지분의 72.85%를 가지고 있다.

쌍용자동차 문제의 절정은 2009년에 있었던 쌍용차 구조조정과 노동자의 장기파업 사태였다. 애초 2004년 상하이자동차가 인수할 당시 상하이자동차는 중국의 신생기업으로서 자동차의 핵심 기술이 필요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자동차의 핵심기술을 유출해 갈 것으로 우려했으나, 상하이 자동차가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면서 무마되었다.

하지만 상하이자동차는 단 한 번도 대규모 투자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기술과 핵심인력을 중국으로 빼갔다. 이 부분은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까지도 문제를 제기했을 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그러나 기술과 자본을 다 획득한 상하이자동차는 이후 쌍용자동차에서 손을 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는 좋은 빌미가 되었고, 상하이자동차는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행한다.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자동차가 경영상의 긴박한 이유가 생겨 3000여명을 정리해고 해야 한다고 밝혔다. 첫째는 유동성 위기로 인한 부도상황이었고, 두 번째는 과도한 부채비율로 인한 부실기업화였다. 하지만 이는 처음부터 조작된 거짓말이었다. 첫 번째 이유였던 유동성위기는 쌍용자동차가 가진 부채에 비해 보유 현금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차에 주었어야 했던 현금이 제대로 지급되었다면 부채를 충분히 해결하고 남는 금액이었다. 두 번째 과도한 부채비율은 회계를 조작해서 발생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다 드러나기 전인 2009년 회사는 2646명의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한다고 밝혔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퇴직금을 담보로 한 긴급 자금 마련과 일자리 나누기 등의 대안을 제시하며 정리해고만은 막아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회사의 거절로 인해 77일간의 공장 옥쇄 파업을 돌입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사측의 입장변화를 이끌어 보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회사는 공장에 의료진과 식수 등도 반입하지 못하게 비인도적 행태를 보이며 탄압했다.

결국 2646명 중 1666명이 희망퇴직을 하고 나머지 980명은 정리해고 하는 안에서, 980명중 459명은 무급휴직, 353명은 희망퇴직, 3명은 영업직 전환으로 하는 안에 합의를 하며 파업을 끝이 났다. 그리고 이 투쟁에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한상균 위원장이었다.

투쟁 이후 한상균 위원장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2012년까지 복역해야 했다. 출소 이후 2014년 12월 민주노총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후 2015년 세월호 1주기 집회와 6월 노동절 대회에서 불법 집회를 주동했다는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검찰은 징역 8년을 구형했고,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당시 정리해고, 희망퇴직 한 노동자들은 갑자기 직장과 수입을 잃게 되었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 이후 많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자살 또는 돌연사로 사망하게 되었는데 무려 28명이 사망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아직도 정신적 외상과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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