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 구긴 ‘이빨 빠진 호랑이 미국’의 새로운 길

최근 미국이 체면을 잔뜩 구겼다. 3월 25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 선 조치에 스냅백(snapback·제재를 풀되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제제를 다시 재개시키는 조치)을 긍정했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의 반대로 2차 북미정상회담 합의문 도출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통령과 참모(부하)의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회담을 깬 미국의 혼란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이토록 우왕좌왕하는 ‘초강대국’이라니, 지금까지 이런 미국은 없었다.

언뜻 강경해 보이는 폼페이오와 볼턴의 행보도 이상하리만치 뜨뜻미지근하다. 이 두 인물은 지난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은 동창리 서해 미사일 발사장을 겨눠 ‘약속을 깨는 움직임에 경고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3월 18일 폼페이오는 “비핵화는 김정은 위원장의 약속인 만큼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과의 전면대결이 아닌 대북 제재를 바탕에 둔 협상(대화)을 이어가겠다는 취지다.

일단 미국은 북한을 향한 ‘간접적 군사대응’을 취하긴 했다. 3월 20일,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는 ‘하늘의 요새’라 불리는 B-52 전략폭격기 2대를 괌에 있는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일본 동해상 근처의 캄차카 반도 인근으로 보냈다. 그런데 사령부는 이에 대해 ‘(B-52는) 국제법과 관련 규정을 준수한 가운데 관련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운영된다’고 일축했다. 한반도 인근에 전략폭격기를 출격시켜 북한에 대놓고 직접위협을 가하던 지난날과는 확연히 다르다.

반면 북한에서는 이와 관련해 별다른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70년 넘도록 미국의 강력한 제재를 받아온 북한은 오늘도 무너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난 평양정상회담을 통해 확인됐듯 평양의 시가지에는 높다랗고 각양각색의 알록달록한 빌딩이 올랐다. 적어도 500만 명이 넘는 북한 주민들이 길거리에서 스마트폰을 활용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밖에도 원산·갈마 해안관광지구를 비롯해 전역에서 27개의 경제특구가 추진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초강대국 주도로 ‘한 점에 집중된 제재’에도 북한이 이만큼의 발전을 이뤄낸 것이다. 이쯤 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언급했듯 제재와는 무관하게 발전해나가는 ‘자력갱생 전략’이 북한사회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고 봐야 한다.

만에 하나 북한의 경제사정이 지독하게 어려웠다면 3월 15일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을 전면 중단할 수 있다”는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말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 하나, 최선희 부상의 언급에도 한반도 주변에서의 전략자산 전개, 선제공격 언급 등 북한을 향한 미국의 매서운 ‘단골전략’이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전면대결을 한사코 거부하며 협상에 중점을 둔 미국의 대북전략, 이 ‘궤도수정’은 국가핵무력-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해 미국 본토에 겨누는 북한에 공격이 불가능하니 제재에만 매달리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자가당착(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은 대북제재 조치를 둘러싸고 실시간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점입가경-혼란을 봐도 단적으로 증명된다.

앞서 3월 22일(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북한에 대한 기존 제재에 더해 대규모 제재가 추가될 것이라고 재무부에 의해 발표가 이뤄졌다”며 “나는 이러한 추가제재 철회를 지시했다”고 밝히며 추가대북제재를 철회했다. 이에 대해 재무부가 전날 북한 측과 거래한 중국 선박에 가한 제재는 유지하되, 재무부에서 확정지었지만 공개하지 않은 ‘대규모 대북제재’가 철회됐다는 ‘관측’이 전해지고 있다.

같은 날 존 스미스 전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장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놀라움의 연속인 이 행정부에서도 이것은 또다른 첫 사례”라며 “북한과 중국의 승리이고 미국 신뢰성의 손실”이라고 비꼬았다.

심지어 지난주 NSC(국가안보회의)에서 볼턴의 주도로 결정된 재무부의 추가 대북제재 조치를 트럼프 대통령이 철회시켰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3월 26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NSC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조치를 반기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 나왔지만 볼턴이 ‘트럼프를 잘 안다’면서 무작정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그 뒤 볼턴은 트위터에 “추가 제재 환영” 입장을 냈지만 불과 몇 시간 뒤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철회” 트윗을 보내면서 창피를 당했다.

이렇듯 2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미국 내에서 빚어지고 있는 촌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국이 북한 앞에서 종잡을 수 없이 갈짓(之)자 걸음을 걷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미국의 모습은 영락없이 뾰족한 수단 없이 대북 제재만이라도 밀어붙여야 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 꼴이다.

분명한 사실은 세계에 대북압박을 요구해오던 ‘대장 격’인 미국의 제재 철회가 가지는 무게다. 무엇보다 행정부 차원의 대북제재를 대통령이 직접 거둬들인 것은 전례가 없다. 영변 폐기에 상응하는 제재 일부 해제 조치도 받지 못하고 정상회담 판을 걷어찬 미국이 북한의 향후 조치에 조바심 내며 설설 기는 모양새로 봐도 지나침이 없다.

‘영변 핵시설 폐기’라는 북한의 제안을 받아 상응조치를 취하자니 패권국가 체면에 영 모양이 서지 않는 미국의 딱한 처지다.

그런데 해법은 있다. 미국이 패권국가, 깡패국가, 전쟁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걸으면 된다. 애초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의 1항은 ▲‘양국 국민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마음으로 새로운 북미 관계를 추진한다’, 2항은 ▲‘북미는 한반도에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이다. 3항에 가서야 비로소 ▲‘4·27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며,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따라서 지난 합의를 무시하고 ‘북한이 먼저 검증된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제재고 뭐고 내놓을 것이 없다’는 미국의 모습은 약속을 뒤집고 ‘강짜’를 부려대는 양아치와 다름없다. 이처럼 사실관계에 비춰 봐도 오늘날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공동 노력에 재를 끼얹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이와 관련해 3월 15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이자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선신보는 <조선 외무성 통보모임에서 밝혀진 미국의 오만과 궤변>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최선희 부상의 말을 전했다.

“제재가 완화되기 전에 조선(북한)이 먼저 비핵화를 해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는 말이 되지 않으며 이런 식의 협상에 나설 의욕도 계획도 없다고 단언하고 우리 국무위원회 위원장 동지께서 핵단추나 로케트 발사 단추를 누르시겠는지, 안 누르시겠는 지에 대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본다.”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를 통해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압박을 계속한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고 미국에 경고했다. 만약 북한이 15개월 간 중단한 핵실험을 다시 전개한다면, 최고인민회의를 마치고 오는 4~5월 또는 여름께 모스크바에서 열릴 것으로 관측되는 북러정상회담에서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를 뚫는 획기적인 조치를 밝힌다면 더 이상의 수가 없는 미국은 사면초가에 빠질 뿐이지 않을까.

미국은 더 이상 늦기 전에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여 상응조치를 발판으로 새로운 북미 관계-평화체제 구축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동안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견지해오던 군사적 패권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던 제재를 스스로 무력화시키는 상황이 얄궂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그것이야말로 미국이 걸어야 할 유일한, 새로운 길이니 말이다.

어차피 해법이 하나밖에 없는 이상 더 이상 구길 체면도 없지 않나. 무턱대고 패권을 휘두르던 미국의 시대는 가파르게 저물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국제사회에 솔직한 미국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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