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선언에 ‘화들짝’ 놀란 아베 정권

4월 27일 오후 6시 7분쯤 스마트폰의 진동이 두 번 울렸다. “호외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 발표 조선(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목표 공동선언”이란 제목의 일본발 마이니치신문 기사.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일본이 뒤집어지고 있다.

일본정부의 변화

회담 전까지만 해도 아베 정권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은 진행되고 있다. 북한의 ‘웃음외교’에 눈을 빼앗기지 말고 지금은 압력을 완화할 때도, 북한에 보답할 때도 아니”라고 북한을 철저히 깎아내렸다. 북한이 설령 장거리미사일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기할지라도 일본을 겨냥한 중거리 핵미사일이 남아있으니 위협은 여전하고, 납북된 일본인 피해자 송환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면서.

그리고 회담 당일, “그런 일(재팬패싱·일본배제)은 전혀 없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열린 당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높아진 목소리 톤으로 다급히 말했다. 남북 북미정상회담 국면에서 “일본이 모기장의 바깥에 놓여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아베 총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11시간에 걸쳐 이야기했고 기본적 방침은 일치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야기했다. 일본과 미국의 기본적 방향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도 일치했다” 아베 총리는 미국과 한국 지도자와 얘기를 나눴다며 일본이 소외되지 않았다고 연거푸 강조했다. 북한과의 직접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삭줍기’를 시도하고 나선 일본정부의 절박함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지구촌에 깊은 감동과 환희를 선사하며 마무리 된 판문점선언을 지켜본 아베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의 비핵화 등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것을 북한을 둘러싼 여러 현안의 포괄적인 해결을 향한 적극적인 움직임이라 (보고) 환영한다”고 마지못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4월 17일 저 멀리 플로리다까지 날아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아베 총리가 “회담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를 언급해 달라”고 읍소했지만 미국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결국 아베 총리는 지난 1일 정상회담 차 요르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내외기자회견을 가지고 “우리나라(일본)는 (2002년) 일북평양선언에 기초해 북한과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 하겠다”고 밝혔다.

북한혐오를 바탕으로 정권유지에 골몰하던 집권 자민당을 비롯한 일본 내 보수 세력의 태세는 무너지고 있다. 더 이상 대북공세가 먹혀들 수 없는 가운데 일본정부가 북한과의 진정한 대화에 나서 북일국교정상화라는 성과를 받아드는 것 이외의 답안은 없어 보인다.

일본여론의 변화

‘북한의 노림수는 전쟁과 위협’ 남북정상회담 이전까지 북한의 대화의지를 미심쩍게 바라보던 일본의 기존 여론이었다. 그러나 회담 이후, ‘불량국가’로 낙인찍던 북한과 그 최고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평가하자는 여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4월 27일 리병휘 조선대학교(토쿄 소재) 교수는 니혼티비에 출연해 “북한은 스스로의 국방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미국에도 (그에 맞는) 상당한 대응을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리 교수는 “한국전쟁이 종결해 정전협정이 효력을 잃으면 한국전쟁의 지속을 전제로 한국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 ‘어째서 있는 건가?’라는 물음이 생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리 교수는 북미관계정상화에 따라 주한미군, 나아가서 주일미군의 필요성이 부정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 연일 북한의 위협을 빌미삼아, 미군과 자위대의 연계로 동북아시아에서의 군비증강에 전력하겠다고 해오던 아베 정권에게는 자못 충격적인 주장이다.

이어 그는 30일 후지티비 계열 방송프로그램 <프라임뉴스>에 출연해 “아베 총리가 조선학교를 방문해야 한다”며 “북한과 일본의 민간교류가 이뤄져야 한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북한식 사회주의 교육’을 기치로 건 조선대학교의 입장이 공중파를 통해 고스란히 전파된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북한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던 일본의 여론이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급속히 바뀌고 있다는 뚜렷한 실례다.

‘북한은 위험한 적’이라는 인식이 그동안 일본여론을 좌우해 왔다. 아사히신문이 지난 3월 14일부터 4월 25일까지 전국 유권자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중국의 해양진출과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 등 최근, 일본 주변의 안전보장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불안을 느낍니까”라는 질문에 불안을 느낀다는 응답이 무려 92%(많이 느낀다 48%, 어느 정도 느낀다 42%)로 나타났다. 중국이 조사대상에 포함됐지만, 북한에 대한 일본여론의 적대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토록 북한을 적대시하는 여론이 높았던 배경으로는 팔짱을 낀 채 대북혐오여론(북풍)을 호재로 활용하려 했던 역대 정권의 전략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아베 정권은 북미전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반도에 자위대 파견을 검토하고 있단 정보를 언론에 흘리고 토쿄(東京) 시내 한복판 초등학교에선 북한과의 전쟁을 가정한 대피훈련을 실시하는 등 이전과 비교해 봐도 훨씬 심했다. 이로 인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거야’라는 일본의 과잉반응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일본이여 늦기 전에 대화에 나서라

지난 3일 요미우리신문은 중고생신문의 1면에서 <남북정상 경계선을 넘어>란 기사를 통해 ‘한반도는 평화와 번영, 통일로 나아갈까’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1945년 일제 패망 이래 줄곧 분단된 한반도를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던 일본의 여론이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한혐오에 매몰됐던 일본의 편협한 시각이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지만 아직 일본정부가 나아갈 길은 멀어 보인다. 결정적으로 일본이 불량국가 북한에 지대한 피해를 입은 당사국이라는 ‘일본중심적’ 사고방식이 아직 위세를 떨치고 있다.

4월 30일 아사히신문은 익명의 북한통을 인용해 “북미회담이 성공할 경우 (북한이) 다음으로 일북정상회담에 임할 방침을 밝히고 있다”며 “북한은 국교정상화에 동반하는 일본으로부터의 경제지원을 염두에 두고, 일본이 관심을 밝힌 일본인납치문제 대응에 대해 이미 검토를 시작하고 있는 모양”이라 보도했다. 일본적인 입장에서 해석해 희망을 높이려는 취지로 읽힌다.

이와 관련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6일 ‘행장을 차리기 전에 마음부터 고쳐 먹으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일본은 미국 상전에 청탁하고 주변 대국에 구걸하며 남조선 당국에 빌붙어서라도 평양 문턱을 넘어서 보려고 권모술수를 다 쓰고 있지만 고약한 속통과 못된 버릇을 버리지 않는 한 억년이 가도 우리 땅을 밟아보지 못할 것”이라며 “마음부터 고쳐 먹으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일본정부가 변화 없이 북한에 대한 압박과 제재 기조를 유지한다면 북일정상회담에 나서지 않겠다는 분명한 경고장을 던진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코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가 평양을 찾았던 2002년 9월 17일, 당시 교도통신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납치문제는) 참으로 불행한 일로서 솔직히 사과하고 싶다. 관계자는 처벌했으며 앞으로 절대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코이즈미 총리 휘하의 아베 당시 관방부장관(일본정부 부대변인)은 ‘납치 문제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이 없다’며 선언을 뭉갰다. 일제지배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는 끝내 나오지 않았고 북한에 대한 식민지배 청산 및 배상논의도 중단됐다. 이후 단절된 북일관계가 현재까지 이어졌다.

앞서 정부에 비판적인 군소언론 등 물밑에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일본정부의 대북정책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지난 4월 5일 닛칸겐다이와 인터뷰를 나눈 북한통 고미 요지(五味洋治) 토쿄신문 기자에 따르면 고미 기자가 “대북제재에도 북한경제는 영향이 없는 게 아닐까”라 말해도 정부 관계자의 입에선 “그런 보고는 역효과가 되는데 (북한이) 곤란하다든지 고통 받고 있다는 정보는 없느냐”는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믿고 싶은 대로, 짜 맞추기 식으로 북한을 멋대로 규정하던 일본정부의 기류가 ‘재팬패싱(일본배제)’이란 결과를 낳았단 해석이 가능하다.

판문점발 ‘북한 충격파’가 일본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꿀까? ‘시작이 반’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당장은 북한의 움직임을 두고 보겠다는 여론이 일본을 맴돌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당일, 일본에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벌인 대화가 재일동포의 활약으로 실시간-동시통역돼 대중에 전해졌다. 일본정부가 이런 ‘좋은 의미의 집요함’을 갖춰 일제침략에 대한 철저한 사죄와 배상을 명시하고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다면 ‘동북아의 왕따’에서 벗어날 활로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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