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세상천지가 앞으로 어떻게 뒤집어지는가 보라!”

#5 마오쩌둥

“주석님, 방금 보도로 나왔는데 미제의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우리를 폭격하겠다고 엄포를 놨습니다.”

“흠. 좀 세게 나오는구먼. 뭐 예상은 했으니까.”

마오쩌둥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 전쟁도 불사하겠다 이건가?”

“우리 핵개발 장소인 신장 위구르 지역은 물론이고 베이징도 폭격하겠답니다. 3차 세계대전까지 언급했습니다.”

“뭐 그건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난 사실 미제보다 소련이 더 싫어. 어떻게 같은 사회주의 국가끼리 그럴 수 있냔 말이야. 흐루쇼프 그 자는 혁명의 배신자야. 카악, 퉤.”

마오쩌둥은 타구에 가래침을 뱉었다.

중국은 1955년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확대회의 결정을 통해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1962년, 중국의 핵실험이 임박하자 기존 핵보유국들은 중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63년 8월 미국, 영국, 소련은 ‘대기권 내, 우주공간 및 수중에서 핵무기 실험을 금지하는 조약’, 즉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을 체결해 지하 핵실험을 제외한 사실상 모든 핵실험을 금지하였다.

한편 흐루쇼프 집권 후 소련은 중국과 노선갈등을 빚고 있었다. 소련은 중국과 맺은 합의에 불성실했다. 핵폭탄과 미사일 기술을 전수하기로 하고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소련은 핵개발을 통해 중국의 국제 지위가 올라가면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 1959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흐루쇼프에게 마오쩌둥은 “우리 합작사업 다 파기하죠”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소-중 사이의 합작사업들이 상당수 파기됐다. 게다가 1962년 발발한 중국-인도 전쟁에서 소련이 인도를 지지하면서 양국은 사실상 적대국이 되어버렸다.

1965년 마오쩌둥은 장시성(江西省) 징강산(井冈山)을 방문해 시를 한 수 읊었다. 징강산은 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홍군의 탄생지다.

곤붕이 날개를 펴니 구만 리를 날고, 날개를 좌우로 흔드니 양의 뿔 모양이라.
아침의 푸른 하늘을 뒤로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 사는 세상은 다 같구나.
포화연기가 하늘에 자욱하고, 탄흔이 사방에 가득하여
새 집조차 놀라 엎어지고 난리구나.
어떻게 그럴 수가! 아, 나는 돌아가야겠다!
귀인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물으니, 새가 말하기를:
어느 선산 옥루에서, 2년 전 가을 달 밝은 밤에
세 집끼리 모여 무슨 조약이라는 것을 맺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고작
무엇을 더 먹을 것이 없을까? 구운 감자요리와 함께 소고기를 다시 먹어 볼까였다.
허튼 소리들 하지 마라! 세상천지가 앞으로 어떻게 뒤집어지는가 보라!

여기서 곤붕이란 장자에 나오는 상상의 큰 물고기와 새를 말한다.

기존 핵보유국들의 압박에도 중국은 1964년 10월 첫 핵실험에 성공한다. 그리고 3년 후인 1967년에는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한다. 1970년에는 인공위성 발사도 성공해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술을 보유했음을 보여주었으며 1972년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훈련을 하였다.

마오쩌둥은 첫 핵실험 후 발표할 정부 성명 문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국제사회의 압박을 이겨내고 핵폭탄을 갖게 된 역사적 현장에서 발표할 중요한 성명이기 때문이다. 어떤 논리로 전 세계 여론을 돌려세울 것인가.

“날로 늘어나는 미국의 핵위협을 마주하여 중국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다. 중국이 핵실험을 진행하고 핵무기를 발전시키는 것은 핍박에 못 이겨서다. …
미국의 핵잠수함이 일본에 진주하여 일본인민, 중국인민과 아시아 여러 나라 인민들을 직접 위협한다. …
중국이 핵무기를 발전시키는 것은 곧바로 핵대국의 핵독점을 깨뜨리고 핵무기를 소멸하기 위해서이다. …
중국정부는 정중히 선포하는바, 중국은 그 어떤 시각, 그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다. …
중국의 핵무기장악은 투쟁 중의 여러 나라 혁명인민들에게 커다란 고무로 되고, 세계평화수호사업에 대한 거대한 기여로 된다. …
일단 그들(미국과 동맹국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핵무기가) 있으면 그들은 그처럼 우쭐거리지 못하고, 핵협잡과 핵위협 정책이 그처럼 잘 통하지 못하며, 핵무기의 전면금지, 철저파기 가능성도 늘어난다. …
세계 여러 나라 수반회의를 소집하여 핵무기의 전면적인 금지와 철저한 파기문제를 토의하자. …
중국정부는 예나 다름없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국제협상을 통해 핵무기의 전면금지, 철저파기라는 숭고한 목표가 실현되도록 촉진할 것이다. 이 날이 다가오기 전에는 중국정부와 중국인민은 흔들림 없이 자기의 길을 걸으면서 국방을 강화하고 조국을 보위하며 세계평화를 수호할 것이다. …”

핵보유가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 중국은 모순처럼 들리는 주장을 통해 자신들의 핵보유를 정당화했다.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은 소련과 달리 대화를 통한 평화공존을 선택했다. 1971년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가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를 시작으로 1972년 이른바 ‘핑퐁외교’, 1973년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중국과 미국은 관계정상화의 길을 걸었다.

후대들은 마오쩌둥의 최대 업적으로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양탄일성(兩彈一星)의 개발을 꼽는다. 양탄일성이란 핵폭탄과 수소폭탄, 그리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말한다.

#5-1 헨리 키신저

중국이 핵폭탄, 수소폭탄에 이어 인공위성 발사까지 성공하자 헨리 키신저는 부랴부랴 중국에 들어갔다. 중국은 미국에게 세 가지를 요구했다. 대만을 인정하지 말고 자신을 인정할 것, 대만 주둔 미군을 철수할 것, 대만과 군사동맹을 파기할 것.

첫 번째는 곧바로 실현됐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 가입이 승인됐고 대만은 쫓겨났다. 중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일본이 미국보다 먼저 중국과 손을 잡았다. 1972년 9월 29일 중국과 일본은 전격적으로 수교를 맺었다.

나머지 요구는 시간이 걸렸다. 미국 내에서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만에 무기를 수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미 군수업체와 공화당이 격렬히 반대했다.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선거 기간 내내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반대했으며 같은 당 상원의원 베리 골드워터는 카터 행정부를 대법원에 제소하기까지 했다.

결국 1979년에야 대만 주둔 미군이 철수하고 상호방위조약도 폐기했으며 중-미 수교도 이루어졌다.

이처럼 중국은 핵개발을 통해 자신들이 요구하던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했을 뿐 아니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대만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통일’을 할 수 있었다.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므로 중국은 형식적으로 분단 상태가 아닌 셈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며 마오쩌둥은 “핵개발은 미국, 서방의 문을 여는데 있어 최고의 방법”이라고 평가했다.

키신저와 마오쩌둥

1장 참고자료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 외1, 사이언스북스, 2005.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1』, 올리버 스톤 외1, 들녘, 2015.
「트루먼의 원폭 투하는 스탈린을 겨냥한 ‘무력시위’였다」, 정욱식, 프레시안 2012.1.25.
「중국 핵개발과 북한 핵개발에 대한 비교단상」, 정기열, 통일뉴스 2009.6.15.
「비슷하지만 다른 중국과 북한의 핵노선」, 동북아의 문, 2013.6.21.
「맨해튼 계획」, 위키백과
「노르웨이 중수 사건」, 위키백과

 


한반도 핵문제의 시원과 역사, 그리고 새로운 단계를 그린 팩션 [핵공존체제]

1장. 트리니티 테스트(Trinity Test)
아인슈타인의 후회
스탈린의 걱정
히틀러의 핵개발을 막아라
핵폭격에도 버틴 일본, 그러나…



 

관련기사

댓글

소중한 의견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