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거스르는 문재인의 ‘과거사 쇼통’

“절실한 기대를 안고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전부터 지속적으로 2015 한일 위안부합의는 국민이 수용하지 못하고 피해자 중심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재협상 내지는 무효화를 공약으로 밝혀왔지만, 출범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2015 위안부합의 문제를 포함하여 일본정부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2017.09.13.)

최근 당분간 일본과 얽힌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지 않겠다고 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가운데 문 대통령이 공약을 뒤집었다는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9월 8일 러시아의 극동지역 개발 국제회의인 동방경제포럼 참석차 블라디보스토크에 방문한 문 대통령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과 미사일 도발로 인한 동북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미래지향적이고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자”는 내용에 합의했다.

이와 관련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양국의 문제를 풀어가자는 데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문제 등에서 발목을 잡히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이슈를 끌고 가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같은 문 대통령의 발언은 그동안의 ‘소통 행보’와는 동떨어진 것이라 그 배경을 둘러싼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우선 문 대통령의 생각이 담긴 취임사와 광복절 경축사를 들여다보자.

5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문 대통령은 “국민들의 서러운 눈물을 닦아드리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낮은 사람, 겸손한 권력이 돼 가장 강력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군림하고 통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며 포부를 밝혔다.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문 대통령은 “우리가 한일관계의 미래를 중시한다고 해서 역사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문제를 제대로 매듭지을 때 양국 간의 신뢰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라고도 했다.

이밖에도 문 대통령은 공공연히 “한·일 위안부 합의는 국민정서와 거리가 먼 것” 이라고 밝히며 위안부 합의의 ‘성실한 이행’을 요구하는 일본정부의 요구를 물리쳐 왔다. 외교부는 이에 보조를 맞춰 지난 7월 31일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태스크포스)’를 꾸려 박근혜 정부 당시 위안부 합의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오태규 위안부 TF 위원장(전 관훈클럽 총무)은 “장관도 그렇고 대통령도 몇 차례 ‘위안부와 다른 한일 관계는 별도로 해나가자’고 말했다”고 전했다. 오 위원장을 비롯한 9명의 위원들은 피해자들의 의견을 청취해 위안부 합의의 경위 및 진행과정 등을 면밀히 검토해 평가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렇다면 ‘출범 4개월이 되도록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왜 제기되는 걸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일 과거사를 둘러싼 정부의 공식대응을 살펴보면 피해 당사자와의 소통이 부족했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에 국정농단 사태로 치달은 박근혜 정부의 불통을 반면교사 삼아 대화와 소통의 의지를 피력한 새 정부의 태도가 이전 정부와 똑같다는 비판마저 제기되고 있다.

여성가족부와 외교부 등 위안부 합의를 다루는 주무부처는 정부 출범 초기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현백 여가부 장관은 취임 당시 “한일합의로 탄생한 ‘화해치유재단’ 사업은 여러분과 함께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며 “피해자 지원과 보호를 담당하는 여성가족부가 외교부와 함께 지혜를 모아 피해 할머니들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부 역시 위안부 태스크포스의 출범과 관련 “피해자 중심주의를 견지하면서 위안부 피해자 및 관계자들의 의견도 청취해 나가기로 했다”라는 공식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위의 부처가 위안부 할머니들과 대표적 시민단체인 정대협에 의견을 구하지 않고 있으며 화해치유재단도 존속되면서 그동안 소통을 강조해 왔던 정부의 태도가 사실상 보여주기 식 ‘쇼통’이 아니었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문 대통령이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 등을 청와대에 초청해 정중히 대접한 것과 달리 정작 위안부 합의와 관련된 사안에는 불통을 이어가며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는 9월 8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외교부는 연말까지 2015 한일합의 검증을 한다했고 TF팀을 발족했는데, 뭘 검증하나 우리 측과 접촉도 없다. TF팀 구성 때도 일방통행이더니 조사도? 그리고 아베를 만난 문 대통령은 과거를 일단 봉합하겠단다. 역사가 무슨 편지봉투도 아니고”라고 말했다.

윤 대표는 그러면서 “여성가족부는 8월 말까지 화해치유재단 조사를 끝낸다 했는데 할머니들께도 정대협에도 전화 한 번 없었다. 누가 조사를 했는지도 모른다. 화치재단 당연직 이사로 참여하고 있는 권익증진국이 했나?”라며 정부를 강하게 성토했다.

실제로 9월 15일 한겨레에 따르면 외교부는 송기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국제통상위원장 등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협상 관련 문서 공개’를 하자 이에 대해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는 정보이며 현재 진행 중인 재판과 관련된 정보”라고 비공개로 통보했다.

정부는 출범 이래 ‘촛불혁명’을 강조하며 사회대개혁을 위한 적폐청산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문 대통령 스스로도 “주요 사안은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다” 면서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다”고 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 취임 후 5개월이 다가오는 지금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비서실 산하에 두었던 시민사회수석비서실의 역할을 강화해 신설한 사회혁신비서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고개를 든다. 정부는 시민사회와의 소통을 강조하며 시민운동가 출신 하승창 시민사회수석을 기용했지만 정작 불통이라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나라 외교부냐?” 김복동 할머니의 질책에 정부는 뒤늦게 답변했다. 9월 22일 영국대사 재직 시절 위안부 피해를 알리는 집회 참석차 영국을 방문한 김복동 할머니를 대접한 바 있는 임성남 외교부 제1차관이 ‘평화의우리집’을 찾았다.

김복동 할머니는 임 차관을 향해 “본래 대통령이 나올 때부터 우리들 문제 해결 짓겠다고 단단히 나오신 분이라 믿고 있었다”며 정부를 질책했다.

“우리 정부 안에서 하는 일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가 싫다 하는 그 돈을 받아서 재단 만들어 놓고는 ‘돈을 반환해라’ ‘재단 철수해라’를 왜 못해주느냐 이 말이에요! 재단 직원들은 돈 받고 있을 것 아닌가. 월급 누가 주노? 정부가 주나? 일본 돈에서, 그 역사 팔아가지고 받은 그 돈을 그렇게 써도 됩니까?”

-2017년 9월 22일 김복동 할머니의 발언

그러자 임 차관은 “추석이라 인사드리러 왔는데 오늘도 할머니께 야단을 맞게 되었다”며 “할머니 말씀 잘 듣겠다. 어렵다 피하지 말고, 문제가 있을 때 정면으로 돌파하자며 서로 이야기 하고 있다”고 답했다.

임 차관은 “(위안부 합의에 대해) 연말 전까지 분명한 결론 낼 것”이라며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분명한 결론이 김복동 할머니와 위안부 합의 무효를 바라는 국민여론이 바라는 방향으로 맺어질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앞서 짚었듯이 위안부TF는 설립의 취지와는 달리 피해자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았다. 임 차관의 방문이 불통 논란의 확산을 방어하기 위해 부랴부랴 마련한 기획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습니다. 대통령부터 새로워지겠습니다.”

-2017년 5월 10일 국회 중앙홀에서 열린 제 19대 대통령 취임선서식에서 문 대통령의 발언

문 대통령 스스로 위의 다짐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올 연말 위안부 합의에 대해 ‘진행과정에서 다소 결함은 있으나 국가적 약속을 깰 수 없으므로 합의는 지속하기로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촛불의 염원을 수행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에 지지를 보낸 국민들은 실망감에 지지를 거둬들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초심으로 돌아가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다고 한 약속을 실천하고 있는지 되물을 일이다. 진정한 촛불대통령으로 거듭나고자 한다면 한일 간 얽혀있는 외교적폐를 청산하는 그 길을 국민과 함께 뚝심 있게 걸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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