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핑계로 한일 과거사 덮으려는 정부

‘지금은 곤란하다’는 문재인 정부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4개월이 지났다. 19대 대통령 선거 이전과 72주년 광복절 무렵까지만 해도 “위안부 합의는 잘못”이라고 명확하게 밝힌 문 대통령을 경계하던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이제는 화색을 짓고 있다. 한일 간 갈등이 첨예한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공식방침이 나와서다.

아베 총리를 정점으로 한 일본의 극우 세력이 문 대통령의 “당분간 한일 과거사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말에 힘입어 날개를 달았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을 향해 ‘반일’ ‘친북’ 인사라며 거리낌 없이 날을 세워 비방하던 극우 성향 산케이신문의 최근 논조는 북핵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문재인 역할론에 초점을 맞췄고 비방은 없어졌다. 그 배경은 분명하다. 문 대통령이 일본 극우세력에게 과거사 문제 외면과 ‘북한 때리기’ 그리고 한미일 공조 강화라는 먹잇감을 던져줬기 때문이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재인 정부는 과거사 해결의 첫 단추를 단단히도 잘 못 꿰었다.
일제의 침략전쟁 시기인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의 숫자는 8만 명에서 20만 명, 징용노동자의 숫자는 113만 명에서 146만 명으로 추정된다.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힘을 모아 위안부 소녀상을 비롯해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워야 한다는 국민적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린 과거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염원은 이처럼 뜨겁다.

그런데도 정부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이 연계해 북한을 압박해야한다는 모양새에만 공을 들이면서 일제의 식민침략에 따른 과거사를 덮으려 하고 있다. 벌써 그 징후가 여실히 보이고 있다. 촛불혁명을 이어가겠다며 피해자중심주의를 앞세웠던 정부의 첫 일성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9월 14일 통일뉴스에 따르면 위안부 합의 폐기와 일본정부의 10억 엔으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청원하고자 청와대에 방문한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와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 등에게 돌아온 대답은 시종일관 한결 같았다. 은수미 여성가족비서관은 “북한 핵.미사일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 정부의 공조가 필요하다. 지금은 위안부 문제보다 한일관계가 중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지난 7월 19일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통해 위안부 기림일을 지정하겠다던 당초의 목표마저 후퇴시키고 있다. 9월 18일 김용길 외교부 동북아시아국 심의관은 국회에서 열린 여성가족위원회 ‘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법개정 공청회’에 서 “일제 피해와 관련해 여러 가지 피해자들이 계시다”라며 사실상 기림일 제정을 유보하는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의 군사 외교적 협력을 강조하고 나선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과거사 문제해결에 대한 약속을 내던진 채 불통과 전쟁위기의 수렁으로 발을 들이고 있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할 것이다.

북핵이 과거사와 무슨 관계길래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북한의 핵보유와 일제가 과거에 저지른 만행은 분명 결이 다른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북핵이 과거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근원적인 질문을 더듬어가노라면 스스로를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여기며 일제의 만행이 잘못됐음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과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문재인 정부의 현주소가 잘 드러난다. 우유부단함이라 평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우유부단함은 여전히 엄존하고 있는 일제의 적폐청산을 소망하는 전 국민적 요구를 철저히 기만하고 배반하는 행위다.

이와 같은 문재인 정부의 ‘오락가락 갈지자 행보’는 진하게 드리워진 미국의 그림자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실제로 공공연히 한일 간 과거사 문제의 봉합을 원한 미국은 여러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며 이 사안에 아주 깊숙이 개입해왔다.

문 대통령 당선 직후 아베 총리는 “(문 대통령과) 가능한 한 빨리 만나서 솔직한 의견교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의 앞에는 “손을 맞잡아 미래지향의 한일관계를 폭 넓은 분야에서 발전시키고 싶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베 총리가 말한 미래지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을 살피면 정부가 미 정부와 일본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이 뚜렷하게 포착된다.

‘미래지향의 한일관계’란 무엇일까. 아베 정권의 입장에서 보자면 골치 아픈 과거사를 더 이상 언급하지 말고 한미일 동맹을 주축으로 삼아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는 노력을 기울이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정확히 미 정부의 입장과 일치한다. 미 정부는 전범국이란 낙인을 벗고 동북아시아의 군사대국으로 ‘재기’하고자 하는 아베 정권을 활용해 동북아와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견지하려 한다. 세간에서는 한국이 미국과 일본의 졸(卒)에 지나지 않는다는 푸념이 들려온다.

2015년 3월 9일 버락 오바마 행정부 당시 미국 국무부의 정무차관(국무부 서열 3위)이었던 웬디 셔먼은 워싱턴DC 카네기국제연구원에서 열린 세미나를 통해 “한국과 중국이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일본과 논쟁하고 있으며 역사교과서 내용, 심지어 다양한 바다의 명칭을 놓고 이견이 표출되고 있다”면서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같은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셔먼의 위와 같은 발언은 “위안부 문제는 끔찍한 인권침해”라고 말해왔던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입장과는 배치된다는 지적이 불거졌다. 전후 상황을 살펴보면 미국의 이 같은 입장선회는 예정된 수순이었음을 알게 된다. 한미일 군사 동맹을 굳건히 다져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는 미 정부의 전략적 차원에서 한일 간 과거사 갈등은 줄곧 골치 아픈 사안이었다.

2015년 12월 29일 오바마 행정부의 마지막 국무부 장관이었던 존 케리는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을 담아 졸속으로 맺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직후 성명을 통해 “미국의 가장 중요한 두 동맹의 관계 개선에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경제와 안보협력을 비롯해 지역과 글로벌 이슈에 있어 양국이 지속적으로 협력하기를 기대한다”고 부연했다.

앞서 2015년 12월 17일 케리는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외교부 장관이었던 윤병세에게 오바마 행정부와 트럼프 신 행정부의 ‘연속성’을 강조한 바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행정부 교체와 관계없이 한·미 동맹과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이 굳건하게 유지돼온 만큼 앞으로도 한·미 관계는 미국의 대외정책의 핵심으로서 계속 유지될 것”이라면서.

과거사 문제를 대하는 미국의 기준은 예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지금이나 자국의 이익에 따라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을 대리해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일본에 쏠려 있다. 미 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환영한다는 수사는 북한의 핵보유를 구실삼아 앞으로도 동북아에서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의 발로다. 아울러 미국이 박근혜 정부에게 위안부 합의를 종용했다는 의혹을 증폭시키는 불씨이기도 하다.

미국의 입김으로 꿰어진 한일관계

문재인 정부를 포함해 역대 한국정부는 그동안 굳건한 한미동맹을 주창해왔지만 그 굳건함이란 한국이 미국에게 종속된 철저한 상하구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9월 7일 일본 후지뉴스네트워크(FNN)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은 대북 대화를 구걸하는 거지같다”고 보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청와대는 일본정부로부터 오보임을 확인했다고 했지만 FNN은 ‘취재 결과 분명해졌다’는 표현을 썼고 이후에도 정정 보도를 하지 않았다)

일본이 미국의 묵인 내지 후광에 힘입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제국주의적 정책을 전개하고 있음을 지적한 <종속국가 일본>을 펼쳐보면 이런 문장이 눈길을 잡아끈다.

“대아시아관계가 대미관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공식 진술에도 불구하고 실상 대미관계가 더 견고해지고 군사화 될 수록 일본과 아시아의 이웃나라 사이의 골은 한층 넓고 깊어졌다”

스스로 촛불혁명을 이어가겠다고 한 문재인 정부다. 그런데 정작 한미일 동맹 강화라는 사슬에 얽혀 위안부 합의 폐기는커녕 무효화라는 이야기도 당당하게 꺼내지 못하는 정부의 행보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무척이나 답답한 나날이다.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독도, 강제징용, 자산침탈 등 일제를 둘러싼 과거사는 어느 것 하나 소상히 밝혀지지 않았고 청산되지 못했다.

8월 14일 문 대통령은 광복절을 맞아 김복동 할머니 등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자와 독립유공자 및 유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또 부귀영화를 누린 친일파와 달리 가난에 허덕이며 산 독립유공자를 국가가 나서 모시겠다며 유공자의 후손들을 3대까지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정작 본질적인 사안을 회피하고 있다. 과거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북한을 핑계로 한일 간 과거사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청와대의 설명은 정말 이상하다. 유공자 대우를 앞세워 위안부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정부는 일본정부의 불가역적인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를 이끌어 낼 책무가 있다. 그 역할을 저버린 채 촛불혁명을 이어가겠다는 수사는 거짓과 오만으로 점철됐던 지난 박근혜 정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정부가 성난 민심의 파도에 직면하는 상황을 또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심히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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